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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중심으로 읽어 보는 세계문학: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세계문학 가운데 멋진 제목을 가진 작품을 손으로 꼽자면 마가렛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도 틀림없이 그 가운데 끼일 것입니다. 이 한국어 제목은 어쩐지 멋있게 들립니다. 다만 자세히 따져보면 그 번역은 한국어로서는 좀처럼 듣기 힘든 표현이고, 또 원제가 뜻하는 바와도 조금 다른 느낌을 줍니다. 작품의 내용을 돌아보고 원래의 제목은 무엇을 뜻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미국인에게 성경 다음으로 인기 있는 책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Gone with the Wind]는 미국의 마가렛 미첼(Margaret Mirchell)이 1936년에 발표한 작품입니다. 25세의 무명작가가 10년에 걸쳐 쓴 소설로, 출간된 해 미국에서만 150만부가 팔린 초베스트셀러입니다. 그 뒤로도 꾸준한 인기를 누려 2014년도의 조사를 보면 이 소설은 미국인에게 성경 다음으로 인기가 높았습니다. 특히 여성들 사이에 인기가 높습니다.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의 매력적인 개성 때문인 듯합니다.

이 작품은 1939년 영화로도 제작되어 널리 알려졌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카데미 9개 부문의 상을 수상한 이 영화로 더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어 번역이 나오긴 하였지만 아직 독자층은 엷습니다. 영화가 소설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소설의 분량이 1000페이지를 넘어 웬만한 독서광이 아니고서는 쉽게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미국 남부인의 편견으로 쓰인 통속 역사소설이라는 비판이 독서욕을 떨어뜨리는 점도 있습니다. 이 소설이 위대한 고전 소설의 목록에 속한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읽을 수 있다면 좋지만 고전이든 아니든 꼭 읽어야만 하는 책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격변기 역사 속의 성장 이야기

이 소설은 1861년부터 1874년까지의 미국의 남부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남북전쟁이라는 큰 사건이 미국의 역사를 바꿉니다. 노예제를 바탕으로 전통적인 농업문화를 이루고 있던 남부의 전통적인 삶의 양식은 이 전쟁으로 무너지고 맙니다. 남부인은 새로운 삶의 양식을 건설해야 합니다. 소설은 이 격변의 과정을 자세하게 묘사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줄거리는 모순적이면서도 개성적인 스칼렛 오하라라는 여성이 걷는 삶의 경로를 따라갑니다. 16세의 스칼렛이 29세의 성인이 될 때까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평화로운 농원에서 품위 있고 안정되게 살던 스칼렛은 전쟁을 맞아 그녀와 가족의 삶을 영위해 주었던 “타라” 농장의 삶을 송두리째 잃게 됩니다. 하지만 스칼렛은 절망과 시련을 잘 버텨냅니다. 이 소설은 격변하는 역사 속에서 역경을 이겨내고 삶을 버텨나가는 억척 여성 스칼렛의 성장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야기의 얼개는 스칼렛의 사랑 이야기로 짜여져 있습니다. 스칼렛이 가진 낭만적인 사랑의 환상은 현실과 어긋나 있습니다. 그녀의 사랑은 실패합니다. 격변하는 역사와 현실의 힘은 그녀로 하여금 생존을 위해 여러 차례 사랑이 없는 결혼을 하도록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땅에 대한 집념, 그리고 역경을 버텨내는 억척스러운 여성의 이야기

이 소설은 삶의 바탕이 되는 땅에 대한 애착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삶의 양식은 바뀌어도 땅은 영원합니다. 전쟁으로 인하여 옛 삶의 방식은 송두리째 사라지고 말지만 스칼렛은 타라 농장으로 상징되는 땅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집을 잃고 떠돌던 그녀는 다시 옛 땅에 돌아와 전쟁으로 폐허가 된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일굽니다. 이 이야기는 여성 주인공이 격변하는 삶의 변화 속에서도 꿋꿋이 땅을 지키면서 삶을 버텨나가는 과정을 다룬다는 점에서 비슷한 주제를 가진 박경리 씨의 대하소설 [토지]를 떠올려 주기기도 합니다. 물론 스케일과 복잡성의 면에서 보자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토지]에 못 미칩니다. [토지]는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집필되어 5부 16권으로 이루어진 분량으로 출간되었고 미첼이 다룬 기간보다 훨씬 긴 20세기 전반의 역사적 격동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남부인의 시각과 노예제의 정당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엄청난 판매 실적을 올린 인기 소설이지만 칭찬만을 받은 소설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분량을 반으로 줄여도 되겠다고 말한 비평가가 있었습니다. 남북전쟁과 그 이후의 시대를 다루고 있는데 이것을 좀더 폭넓은 관점에서 조망하지 못하고 순수하게 남부인의 시각으로만 본 것은 좁고 피상적인 역사 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지적도 많이 빋았습니다. 귀족적 문화와 노예제를 정당화하고 있는 듯한 태도를 보인 것도 비판을 받는 부분입니다. 이 소설에서 농장주와 노예들의 관계는 평화로운 관계입니다. 주인은 노예들에게 너그럽고 노예들은 주인에게 충실하고 헌신적입니다. 타라 농장의 흑인 노예들은 남북전쟁 이후에도 옛 주인과의 삶을 그리워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노예제의 대한 작가의 이러한 시선은 노예제의 비인간적인 면에 눈을 감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KKK단의 폭력성을 경시하고 오히려 미화한 것도 문제입니다. 금기어인 nigger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사용되고 있는 것도 놀라운 일입니다. 대중들에게 매력적으로 여겨지는 스칼렛의 성격도 문학예술적인 관점에서 보면 깊이가 없고 단순하다는 점도 지적받고 있습니다.

제목의 뜻과 출처

이 소설은 줄여 말하자면 미국 남부인이 가졌던 전통적인 삶에 대한 향수와 그 삶을 잃은 데에 대한 절망감, 그러나 역사의 현실로 주어진 역경에 꺾이지 않고 삶을 버텨 나가려는 끈질긴 생명력을 그린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의 제목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말은 바로 남부인의 상실감을 표현한 말입니다. 이 제목은 영국 시인 어니스트 다우슨(Ernest Dowson)이 쓴 “나의 착한 시나라의 지배 아래 있을 때와 같지 않다(Non Sum Quallis Eram Bonae sub Regno Cynarae)”라는 시의 3연 1행의 구절에 나오는 말을 따온 것입니다.

난 많은 걸 잊어 버렸소, 바람과 함께 사라진 시나라!
잃어버린 당신의 창백한 백합을 마음에서 지워버리려
사람들과 춤추며 장미꽃들을 마구 마구 던져 버렸소
. . .

이 시는 옛 연인을 향한 열정을 잃어 버린 어떤 사람의 한탄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미첼은 이 표현을, 잃어버린 남부인의 삶의 방식을 한탄하는 말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의 한 대목에서 스칼렛은 자기 가족의 농장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는지 아니면 “조지아 주를 휩쓸고 지나간 바람과 함께 사라져 버렸는지” 궁금해 합니다. 그 대목에 제목으로 이용된 gone with the wind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제목의 우리말 번역

이 제목을 우리나라에서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직역인 셈인데 멋지게 들려 이 번역 표현은 널리 인용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이 한국어에 있었던 표현은 아닙니다. “바람처럼 사라지다”라는 표현은 있어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표현은 이 소설 제목의 번역에서 말고는 찾기가 어렵습니다. 소설에서 “바람”이 상징하는 것도 남부를 휩쓴 전쟁의 격변이기 때문에 한국어에서 바람이 연상시키는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한국어의 “바람처럼”이라는 표현에는 “순식간에”라는 뜻과 “흔적도 없이”라는 뜻이 섞여 있습니다. 또는 “일정한 방향이 없이 이러저리 (떠도는)”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한자어에서 온 우리말에 “표표히(飄飄-)”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방랑객이 바람처럼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것을 말합니다.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갔다”라는 표현도 그와 관계된 표현입니다. 한자어 “표(飄)”는 “(바람에) 날아 흩어지다”, 또는 “바람처럼 떠돌다”라는 뜻을 가진 말인데 흥미로운 것은 중국에서 Gone with the Wind의 제목이 그냥 “飄”자 하나로 번역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글자 하나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표현의 뉘앙스가 상당히 표현되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원래 작가가 떠올린 바람의 이미지와 같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소설의 맥락에서는 “바람에 휩쓸려 사라저 버린”이라는 이미지가 강합니다. 영어에서 gone with wind라는 표현은 미첼의 이 소설이 나온 뒤 어떤 것이 “깜쪽 같이 사라졌다”는 뜻을 나타내는 일상적인 관용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마지막 대사: “내일이라는 날도 있으니까”

이 소설에서 나온 말로 제목만큼이나 널리 인용되는 말이 있습니다. 작가가 한때 제목으로도 고려하였던 표현입니다. 소설의 마지막 대목에서 스칼렛은 자기를 버린 레트가 자신이 진정 사랑했던 사람임을 깨닫고 그를 되찾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녀는 이렇게 되뇝니다. “그런 건 모두 내일 타라에 가서 생각하겠어. 그때는 버틸 힘이 생길 테니까. 내일 난 그이를 되찾을 무슨 방법을 생각해 내야지. 어쨌든 내일도 또 다른 하루가 아닌가.” “Tomorrow is another day”라는 말은 미첼이 처음 쓴 말이 아니고 전부터 있던 것이지만 이 소설에서 스칼렛이 하는 말로서 강력한 인상을 남겨 이후로 더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오늘 모든 것을 완결하지 못하였지만 아직 내일이라는 기회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불굴의 정신을 가진 강인한 여성 스칼렛에게 잘 어울리는 말입니다. (필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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