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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herwise

Jane Kenyon

I got out of bed
on two strong legs.
It might have been
otherwise. I ate
cereal, sweet
milk, ripe, flawless
peach. It might
have been otherwise.
I took the dog uphill
to the birch wood.
All morning I did
the work I love.

At noon I lay down
with my mate. It might
have been otherwise.
We ate dinner together
at a table with silver
candlesticks. It might
have been otherwise.
I slept in a bed
in a room with paintings
on the walls, and
planned another day
just like this day.
But one day, I know,
it will be otherwise.

 

달랐을 수도

제인 케니언

튼튼한 두 다리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러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시리얼과, 신선한
우유와, 잘 익고 흠집 없는
복숭아를 먹었다 그러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거다
개를 데리고 언덕 위
자작나무 숲으로 산책을 나갔다
아침 내내 좋아하는
일을 했다

정오에 짝과
함께 누웠다 그러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린 함께 저녁을 먹었다
식탁 위에 은촛대를
놓았다 그러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벽에 그림이
걸린 방 침대에서
잤다 그리고
바로 이 날처럼
또 다른 하루를 계획했다
하지만 난 안다, 어느 날인가는
모든 게 그리 되지 않을 것임을

 


 

제인 케니언 Jane Kenyon (1947 – 1995)

미국의 시인이자 번역가. 미시간 주 앤아버에서 태어나 미드웨스트에서 자랐습니다. 미시건 대학에 다닐 때 19세 연상인 시인 도널드 홀(Donald Hall)을 만나 결혼하여 뉴햄프셔 주 윌못의 이글폰드 농장에서 살게 됩니다. 1995년 뉴햄프셔 계관시인으로 임명된 해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생전에 네 권의 시집을 내었습니다. Constance (1993), Let Evening Come (1990), The Boat of Quiet Hours (1986), From Room to Room (1978) 등입니다. 러시아 시인 안나 아흐마토바(Anna Akhmatova)의 시를 영어로 번역하여 출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녀는 시골 삶을 배경으로 한 시를 많이 썼고 자신의 성인기를 지배했던 우울증에 관한 시들도 많이 썼습니다.


 

[일요 영시 해설] Jane Kenyon: “Otherwise”

이 시의 내용은 평이하고 단순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들기까지의 소박한 일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학교에 다녀와 저녁에 잠을 잤다”고 쓰는 초등학교 학생의 일기와 비슷합니다. 특별히 주목할 만한 사건이나 체험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무엇이 이 평범한 이야기를 한 편의 시로 만들어 주고 있을까요? 그것은 시인이 되풀이해서 삽입하고 있는 “그러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It might have been otherwise)”라는 말입니다. 이 가정법의 말로 인해 평범한 일상의 일들이 새로운 빛을 띠고 심상치 않은 의미를 가진 일들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러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또는 “그러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고 돌아보는 마음, 그 반성적인(reflective) 언급이 모든 일을 그지 없이 중요한 체험으로 만들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는 초등학교 학생의 일기처럼 일상의 반복되는 이야기를 단순하게 적어놓은 시가 아닙니다. 이 시는 커다란 깨달음에 관한 시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일상의 과정이 더 할 수 없이 중요하고 의미 있는 삶의 과정임을 깨닫는 체험에 관한 시인 것입니다.

“아침에 튼튼한 두 다리로 잠자리에서 빠져나왔다.”

사람들은 아침에 잠자리에 일어나면서 잠자리에서 일어난 그 일에 아무런 중요성도 부여하지 않습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뿐만 아니라 하루가 다 지나도록 그 일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다시 생각해 볼 여지가 없는 일로 잊혀지고 맙니다. 하지만 시인은 그 일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그러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라고. 우리가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요? 정말 없을까요? 다시 생각해 보면 우리가 매일 아침 반드시 튼튼한 두 다리로 일어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어느 날 아침 우리는 일어나려다 무슨 이유로 그 자리에 주저앉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우리는 한 달 전, 무슨 일로 다리를 부려뜨려 한 다리에 깁스를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어젯밤에 전혀 예상하지 못 했던 사고가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오늘 아침에 튼튼한 두 다리로 일어서지 못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지 못했을 수도 있다”라는 가정법이 뜻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한 가능성을 받아들이면 오늘 아침에 우리가 튼튼한 두 다리로 잠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은 굉장한 일이 됩니다. 그것은 엄청나게 다행스런 일이고, 더 나아가 축복 받은 일이고, 따라서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침에 튼튼한 다리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의 가치는 그러하지 못했을 경우와 비교해보면 확연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반성을 통해 재발견된 이 일은 초등학생이 무반성적으로 이야기하는 “아침에 일어났다”는 일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시리얼과 신선한 우유와 잘 익고 흠집 없는 복숭아를 먹었다.”

이것은 대부분의 미국인이 즐기는 아침 식사의 내용을 기술한 것입니다. 누가 변한 우유를 마실 것이고 벌레 먹거나 상한 복숭아를 먹겠습니까. 하지만 시인은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라고 다시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튼튼한 두 다리로 일어날 수는 있었다 하더라도 아침 식사를 그처럼 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 그러지 못할 수 있을까요? 부엌 냉장고에 시어버린 우유와 상한 과일밖에 들어 있지 않은 경우가 없다 할 수 없습니다. 시리얼을 며칠째 구경하지도 못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아침마다 시리얼과 신선한 우유와 흠집 없는 복숭아를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도 여러 가지일 수 있습니다. 가난 때문일 수도 있고, 우유배달부가 오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과일 흉년이라 온전한 과일을 구하기가 힘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때가 전쟁중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시기에는 매일 아침에 시리얼과 신선한 우유와 잘 익고 흠집 없는 복숭아를 먹을 수 있는 가능성이 오히려 그러하지 않을 가능성보다 높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시리얼과 신선한 우유와 잘 익고 흠집 없는 복숭아를 먹었다”는 사실은 대단히 다행스럽고 행복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하지 못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다행스런 아침 식사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 일의 다행스러움과 행복을 음미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그들은 그들이 행복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며, 또한 그럼으로써 그들은 그만큼의 행복을 버리고 있습니다. 그건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경우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아침에 튼튼한 두 다리로 잠자리에서 일어났던 어떤 사람이 아침 식탁을 향하다 의자에 걸려 넘어져 다리가 부러지는 바람에 아침 식사 전에 병원에 실려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에게는 아침 식탁에 앉을 수 있다는 일이 전연 다른 의미를 가진 일이 될 것입니다.

시인은 개를 데리고 숲으로 산책을 갔습니다. 아침 내내 하고 싶은 일을 했습니다. 시인은 “하고 싶은 일을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시인은 “그렇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개를 데리고 산책을 다녀올 수 있었고—Thank God—아침 내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시인은 정오에 자신의 짝(남편)과 함께 누웠습니다. 이것은 사랑을 나누었다는 것을 완곡하게 표현한 말입니다. 지금 시인이 기술하고 있는 하루는 어떤 하루일까요? 이들은 직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일까요? 그렇다면 이 날은 일요일인지도 모릅니다. 오전 내내 개와 산책하고 좋아하는 일만 했다니까요. 그리고 남편도 집에 함께 있으니까요. 그리고 한낮에 정사를 나누었으니까요. 아니면 이 사람들은 직장을 가지지 않은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자유업을 가져 출퇴근에 구애받지 않는 사람들. 아니면 시골 같은 데서 농장을 하거나 하는 그런 사람들. 이 시의 화자가 시인 자신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만합니다. 제인 케니언은 시인 도널드 홀과 시골 농장에 살면서 농장 일도 보면서 글을 쓰고 살았다고 합니다. 하여간 시의 화자는 이 날 한낮에 자신의 짝과 섹스를 나누며 행복한 삶의 극치를 만끽합니다(정오의 섹스는 극치의 순간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그러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것” 입니다. 그러하지 못했을 가능성과 이유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시의 화자에게 짝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짝이 있었다 하더라도 멀리 집을 떠나 있었을 수 있습니다. 짝이 집에 있었다 하더라도 다른 일에 바빠 정사에 관심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그가 아침부터 술에 골아떨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그가 한 시간 전까지 멀쩡했다가 갑자기 배탈이 나서 병원에 갔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그가 불행한 사연으로 성불능자가 되어 있을 수도 있고, 또는 그가 벌써 한 달 전부터 병석에 누워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 짝은 시인이 원하는 시간에 곁에 있었고, 건강했으며, 원하는 정사를 나눌 수 있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럴 수 있었다는 것은 다른 무수한 “otherwise”의 가능성을 고려해 볼 때 정말 굉장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럴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어려운 일이 아닐까요.

자신의 짝과 식탁 위에 은촛대를 놓고 저녁을 먹은 것, 그리고 벽에 그림이 걸린 방의 침대에 든 것, 잠자리에서 또 내일의 설계를 한 것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의 화자는 아무런 문제없이 하루를 마치었습니다. 은촛대가 놓인 식탁과 벽에 그림이 걸린 방의 침대 등은 행복하고 다정한 집안을 암시합니다. 화자의 부부는 이처럼 하루를 행복하게 마친 것입니다. 그러나 하루가 다 갈 때까지 그러하지 못했을 가능성은 무수하게 존재합니다. 저녁 식사를 그렇게 하지 못했을 가능성, 저녁 잠자리에 그렇게 들지 못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존재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맨 처음에 이 시를 읽었을 때 아주 평범한 하루의 일상으로 보였던 일들이, 그리고 이주 당연하게 여겨졌던 하루의 일과들이 실은 얼마나 이루어지기 힘든 일일 수도 있는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알고 보면 이것들은 평범하고 당연한 하루의 일과가 아니라 참으로 이루어지기 힘든 일과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삐끗했더라면 이들의 하루는 어느 순간에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을 것이고, 그림이 걸린 방의 잠자리에서 내일을 설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침에 튼튼한 두 다리로 일어설 수 있다는 것도 감격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이 꽤 확률이 높은 일이라고 치더라도 그 뒤의 일들이 그처럼 별 탈 없이 진행될 가능성은 늘 높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지금의 삶과 같지 않았을 가능성도 지금까지 무수했을 것입니다.

시인은 잠자리에서 “바로 이날처럼” 다른 날도 계획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이 평범한 하루의 의미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그 날 하루, 하고 싶은 일을 했고, 별 탈 없이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보냈습니다. 이처럼 이상적인 하루가 있을까요? 따라서 그는 다른 날도 이 날과 똑같이 설계하는 것입니다. 이 평범한 하루가 역설적이게도 시인에게는 가장 이상적이고 행복한 날이었던 것이고 시인은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하루는 감격스럽고 행복한 하루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압니다. “어느 날인가는 모든 게 그리되지 않을 것임을.” 시인의 깨달음은 그가 아침에 잠자리에서 튼튼한 두 다리로 일어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데 있습니다. 그 깨달음은 삶의 다음 순간, 또는 내일, 또는 모레, 그리고 언젠가는 삶이 오늘처럼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깨달음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실 모든 삶은 매순간 우연의 연속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우연은 사람의 힘으로써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우연은 사람의 선택으로 결정되기도 합니다. 사람은 매순간 이렇게 행동할 수도 있고 저렇게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삶은 우연과 선택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 우연과 선택이 우리 삶의 성격을 규정해 줍니다. 그리고 그 우연의 성격과 선택 또는 결단의 주체적 성격이 삶의 의미와 행복을 결정해 줍니다. 그러나 선택이 불가능한 순간, 그러니까 우연이라든가 운명이 우리의 삶을 압도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예측하지 못했던 사고, 짐작하지 못했던 병의 발견은 우리의 선택과 관계없이 우리의 운명을 지배합니다.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언젠가는 우리에게 닥쳐옵니다. 그래서 어느 날은 “모든 게 그리 되지 않을 것임을” 시인은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는 행복감에 관한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가 좋은 점은 행복이란 말을 전혀 사용하지 않으면서 행복의 본질을 독자에게 잘 전달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시인은 그저 하루 동안,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큰 탈이 없는 하루를 보냈음을 보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동시에 매순간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라고 삶의 의미를 성찰함으로써 삶의 모든 순간을 음미하였으며, 자신이 선택한 일을 할 수 있었던 데 충족감을 느꼈음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또한 그처럼 현재에 음미되는 행복감이 미래의 언젠가에 닥칠 “그렇지 않을 가능성”과 죽음의 운명을 내다보는 데서 오는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는 죽음에 대한 인식을 통해 삶의 가치와 행복감을 발견하는 체험을 이야기하고 있는 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스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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