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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and I

Roger McGough

I explain quietly. You
hear me shouting. You
try a new tack. I
feel old wounds reopen.

You see both sides. I
see your blinkers. I
am placatory. You
sense a new selfishness.

I am a dove. You
recognize the hawk. You
offer an olive branch. I
feel the thorns.

You bleed. I
see crocodile tears. I
withdraw. You
reel from the impact.

 

당신과 나

로저 머고프

난 나직이 설명한다. 당신은
고함 소리를 듣는다. 당신은
다른 방식을 시도한다. 나는
옛 상처가 열리는 걸 느낀다.

당신은 양 면을 본다. 나는
당신이 편협해 보인다. 나는
위로하려고 한다. 당신은
또 다른 이기심을 느낀다.

나는 비둘기이다. 당신은
내가 매처럼 보인다. 당신은
올리브 가지를 내민다. 나는
그게 가시투성이라고 느낀다.

당신은 피를 흘린다. 나는
위선의 눈물을 본다. 나는
양보하고 물러난다. 당신은
충격을 받아 비틀거린다.


 

로저 머고프 (Roger McGough 1937 – )

영국의 시인이자 팝 가수. 극작가, 방송가, 아동문학가이기도 합니다. 잉글랜드의 리버풀에서 태어나 헐 대학에서 공부하고, 세인트 케빈 종합학교와 마블 플레쳐 콜리지, 리버풀 예술대학 등에서 가르쳤습니다. 1960년대에 “더 스캐폴드(The Scaffold)”라는 팝뮤직/시 그룹을 결성하여 인기를 얻었고, 1967년에 애드리언 헨리(Adrian Henry), 브라이언 패튼(Brian Patten)과 함께 The Mersy Sound라는 공동시집을 내어 그들과 함께 리버풀 시인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노래 작사도 하고 비틀즈 영화의 각본도 썼습니다. 그의 시는 명랑하고 우스워 대중 사이에 많은 인기가 있습니다. 여러 부문에서 많은 상을 받았고, 1997년에는 대영제국훈장(OBE)를 받기도 했습니다다. 그가 출간한 중요한 책은 다음과 같습니다. Summer with Monika (1967), Out of Sequence (1972), Sporting Relations (1974), Defying Gravity (1993), The Way Things Are (1999), Everyday Eclipses (2002).


 

[일요 영시 해설] Roger McGough: “You and I”

이 시는 소통의 어려움에 관한 시입니다. 이 시에 등장하는 you와 I를 누구라고 생각해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서로 친밀한(intimate) 관계에 있는 사람들임이 분명합니다. 친밀하지 않는 사이라면 이곳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은 소통의 상황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곳의 you와 I는 부부이거나 연인이거나 친구 사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연

“나”는 “당신”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나직이 설명”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내가 소리를 지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나는 적어도 사태를 이성적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에게는 내 말이 그렇게 들리지 않고 고함소리로 들립니다. 둘 중에 하나입니다. 내가 조곤조곤 설명하고 있다는 것은 나의 착각일 수 있습니다. 나는 내가 흥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용히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고 있습니다. 상대방이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니까 나도 모르게 짜증이 났습니다. 혹은 그 반대의 상황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실제로 잘 설명하고 있지만 당신은 이미 흥분해 있어서 내 말이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 당신은 내가 당신의 의견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당신에게 내 말은 내 입장만을 살리려고 억지를 쓰는 소음으로 들릴지도 모릅니다. 누구에게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나와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당신은 다른 방식을 시도해 봅니다. 문제의 원인이 과거의 어떤 일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에게 그것을 일깨우면 내가 당신의 생각에 동의하거나 당신의 주장을 수긍하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다릅니다. 당신이 지난 일을 왜 꺼내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지난 일을 다시 끄집어내는 것은 서로를 위해서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오히려 옛 상처를 다시 헤집어 가슴 아프게 하는 일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악화시키키라 봅니다.

2연

당신은 사태의 “양면을 본다”고 생각합니다. 편견에 치우치지 않고 여러 가지 면을 고루 고려해서 말한다고 생각합니다(누구든 자기가 독선에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당신의 생각은 매우 편협합니다. 당신은 좁은 시야에 갇혀 다른 것은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blinker라는 것은 경마 때 말이 옆을 보지 못하고 앞만 보고 달리도록 옆 시야를 가리는 눈가리개입니다.)

나는 당신을 달래려고 합니다. 당신의 입장을 이해하고 위로하기 위해 말합니다. 하지만 나의 말은 당신에게 전혀 달래는 말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나의 그러한 방식이 당신에게는 이기적으로 들립니다.

3연

비둘기는 평화주의자를 뜻합니다. 평화의 비둘기와 대비되는 새는 “매(hawk)”입니다. 매는 폭력과 힘을 나타냅니다. 정치계에서는 흔히 “비둘기파”와 “매파”라는 말이 온건파와 강경파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됩니다. 커뮤니케이션 상황에서 이 비유가 가지는 뜻은 무엇일까요. 이 편에서 아무리 부드러운 언사를 사용하더라도 당신은 그것을 위협이나 폭력으로 느낄 수 있음을 뜻할 것입니다.

평화와 폭력, 온건과 강경의 비유가 더 이어집니다. “올리브 나뭇가지(olive branch)”는 서양에서 그리스 시대로부터 평화와 선의(goodwill)를 상징해 왔습니다. 왜 평화를 상징하게 되었는지 그 유래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한 가지 설명은 있습니다. 올리브 나무가 열매를 맺으려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쟁의 시기에는 올리브 나무를 기를 수가 없습니다. 올리브 열매를 얻으려면 평화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평화와 연관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로마 시대에 전투에서 패배한 군대가 평화를 원한다는 표시로 올리브 나뭇가지를 들었던 데에 유래가 있었다고도 합니다. 기독교 신화에서도 비둘기와 올리브 나뭇가지는 평화를 상징합니다. 창세기를 보면 대홍수가 났을 때 방주에 피신한 노아가 나중에 뭍을 발견하기 위해 비둘기를 날려보내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비둘기가 올리브 나뭇가지를 물어 옵니다. 노아는 그것을 신이 홍수를 그치게 하고 평화로운 시대를 약속하는 징표로 받아들였습니다.

커뮤니케이션의 상황에서는 평화와 화해의 제스처가 반드시 제대로 전달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화해의 제스처가 당신에게는 화해의 제스처로 보이지 않고 오히려 당신을 더 고통스럽게 만드는 행동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올리브 나뭇가지”가 아니라 당신을 찔러대는 “가시나무 가지”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이때도 두 가지 경우가 가능합니다. 내가 나 자신의 언어나 행위를 제대로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그 하나입니다. 화해의 제스처가 아닌데도 내가 그렇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이때 당신이 나의 언어나 행위를 고통스럽게 여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또 하나는 내가 진정한 화해의 의도를 가지고 있음에도 당신이 나의 의도를 곡해하는 경우입니다. 이때 당신은 당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화해의 제스처를 특수하게 제한하고 있는 셈입니다.

4연

당신은 너무 절망스럽고 고통스러운 나머지 “피/눈물”을 흘립니다. 그런데 나에게는 그것이 순전히 가식적인 눈물로만 보입니다. 나는 당신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당신은 당신의 진정한 고통을 전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러난다(withdraw)”는 단어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화해의 제스처로 나의 입장을 죽이고 당신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아니면 당신에게 내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대화를 단념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자신의 태도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withdraw는 전자의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내가 양보하면 당신은 나의 그러한 양보를 고맙게 생각하고 당신도 부드럽게 나와야 옳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나의 그러한 태도를 전혀 양보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태도가 더없이 위선적으로 보여 충격을 받아 비틀거립니다. 나의 그러한 행동이 전혀 당신을 위한 행동으로 보이지 않고 오히려 모욕적이거나, 아니면 당신에 대한 결정적 일격으로 여겨집니다.

많은 사람이 이 시의 내용에 크게 공감할 것입니다. 사람 사이의 대화의 어려움을 정확하게 묘사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의 내용에 가장 잘 공감할 사람은 아마 부부 관계에 있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부부는 가장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면서도 생각과 공감의 교환의 문제에서 가장 많은 좌절과 절망을 느끼는 사람들이니 말입니다. 어떤 다른 인간관계에서보다 부부 사이에서 좌절과 절망이 큰 것은 부부라는 이유로 소통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가 더 크기 때문일 것입니다. 더 나아가 여기에는 부부가 서로 다른 성문화 속에서 양육되어 서로 다른 대화와 소통의 방식에 익숙해져 있다는 점도 작용할 수 있습니다.

데보라 태넌

젠더의 언어 문제를 연구한 데보라 태넌(Deborah Tannen)에 따르면 남녀의 어법에 큰 차이가 있고, 남녀는 그 어법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소통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남자는 정보를 교환하기 위해서 대화를 하고, 여자는 심리적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서 대화를 한다고 합니다. 부인이 밖에서 누군가와 다툰 이야기를 했을 때 남편은 그 상황의 옳고 그름을 객관적으로 이야기하려고 하고 부인은 남편이 자신을 편들어 공감해 주기를 원합니다. 여성은 공유할 수 있는 경험으로 친밀감을 조성하기 위해 이야기하며(rapport talk), 남자는 자신이 가진 정보나 지식을 상대에게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사회적 입장을 지키거나 강화하기 위해 이야기합니다(report talk). 또 부인은 남편과 대화할 때 “이제 그만큼 오래 같이 살았으니 말하지 않아도 내가 뭘 원하는지 알아야 할 것 아니에요.”라고 말합니다. 그에 비해 남편은, “이만큼 같이 살았으니 이제 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분명히 내놓고 말하면 되지 않소.”라고 말합니다. 또한 남자는 메시지(message) 자체를 중요시하는 한편, 여자는 메시지의 전달 방식, 곧 메타메시지(meta-message)를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남자는 말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이해하려고 하는데 여자는 말의 내용보다는 그 말을 하는 이유와 그 말이 그들의 관계에서 갖는 의미를 더 중시합니다. 식탁에서 부인은 반찬의 객관적인 맛에 관계없이 “맛있다”고 말해주기를 원합니다. 여성적 어법을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은 정보 중심으로 말하려는 경향이 있어 반찬이 짜면 “짜다”고 답변합니다. 정보 중심의 어법에 익숙하지 않은 부인은 남편이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자기 요리가 불만스럽기 때문에, 또는 자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학자들은 남녀가 기대하는 대화 방식이 다르게 된 까닭은, 남자가 사회 생활을 많이 하고 여자는 집안 생활을 많이 하는 문화가 오래 되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합니다. 남자들은 직장에서 과제 해결을 위해 합리적인 정보 교환 중심의 대화에 길들여지고, 여자는 남편, 또는 친구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므로 관계 향상을 위한 대화에 더 익숙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성간의 대화나 소통이 아니라도 어느 인간 관계에서든 근본적으로 완전한 소통은 불가능합니다. 사람의 경험과 생각, 그리고 가치관은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생각의 완전한 일치를 기대하기는 힘듭니다. 그럼에도 소통이 중요하다면 바로 사람의 생각이 저마다 다르다는 것, 그리고 서로의 어법과 기대가 다를 수 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소통이 어렵다는 것을 아는 것이 서로의 이해를 위한 첫걸음입니다. 상대방은 내가 생각하는 방식과 달리 생각할 수 있음을 아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로저 머고프는 이 시를 통해 “당신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메울 수 없는 간극과 그에 대한 절망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지만, 역설적으로 소통의 어려움을 깨닫게 됨으로써 오히려 소통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소통을 위한 첫걸음은 자신을 돌아보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나 자신을 보려는 노력이기 때문입니다. (스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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