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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교육부에서 초등 과정의 한자 교육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한글 전용론자와 한자 혼용론자가 다시 부딪히고 있습니다. 1971년 이후 한글전용 정책에 따라 교과서에서 한자 병기가 사라지고 출판물 대부분과 대중 매체에서 한글 전용이 일반화된 뒤로 주기적으로 되풀이되고 있는 일입니다. 그때마다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어느 쪽 주장이 옳은지, 한자를 배워야 좋은지 아닌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글 전용론자와 한자 혼용론자의 논란은 다소 추상적이고 이념적 데가 있어서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판단에 별 도움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언어학적이고 실용적인 차원에서 살펴보는 것이 이해도 쉽고 논의를 효율적으로 진전시킬 길이라 생각합니다. 문제를 이와 관련된 사람들의 궁금증들을 중심으로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았습니다.

Q. 한자를 모르면 한국어 사용에 지장이 있을까?

A. 한자를 몰라도 한국어 사용에 지장이 없습니다. 실은 한글을 몰라도 한국어 사용에 지장이 없습니다. 오늘의 대한민국 국민 가운데 한자를 배우지 않은 인구는 절반이 넘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우리말을 자유롭게 구사하지 못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한글을 배우지 못한 한국인도 있지만, 그들 역시 우리말에 서투르다 할 수 없습니다. 한국어는 한국인이 태어날 때부터 배우는 모어입니다. 모어 사용 능력은 6~7세면 충분한 정도에 이릅니다. 다시 말해 문자를 따로 배우지 않아도, 전문 분야의 이야기가 아니라면 모어를 사용하여 의사소통하는 데 거의 지장이 없습니다.

Q. 한자를 알면 한국어 사용에 도움이 되는가?

A. 물론 한자에 대한 지식이 한국어 사용에 도움이 됩니다. 어떠한 지식이든 (한자에 대한 지식이든, 일본어에 대한 지식이든, 지리 지식이든 물리학 지식이든) 한국어 사용에 도움이 됩니다. 언어는 세상의 지식을 담는 그릇이어서 다양한 지식을 가진 사람일수록 어휘와 표현을 풍부하고 정확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한자에 대한 지식도, 다른 지식과 마찬가지로 우리말 사용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한결 수준 높은 한국어를 구사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Q. 한자를 모르면 수준 높은 한국어를 구사할 수 없나?

A. 한자를 몰라도 얼마든지 수준 높은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습니다. 독서를 많이 하면 누구든 훌륭한 한국어를 얼마든지 구사할 수 있습니다. 한자에 대한 관심이 있다면 한자를 배워도 좋고, 한자보다 다른 데 관심이 있다면 다른 것을 더 공부하면 됩니다. 관심 있는 분야의 공부를 하는 것이 지식을 효과적으로 더 많이 얻는 방법이고 거기에서 얻은 지식으로도 우리말을 풍부하고 정확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Q. 한국어 어휘 70%가 한자에서 유래한다면 한자 기원을 아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A. 한자에 기원을 둔 말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한자 기원을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강’이라는 말을 잘 사용하기 위해 ‘江’이라는 한자를 알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사과’, ‘내일’, ‘고향’이라는 말도 마찬가지이고, ‘지금’, ‘잠시’, ‘금방’, ‘도대체’, ‘물론’이라는 일상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원을 몰라도 우리는 그 말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기 때문에 그 말들을 정확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 말들을 토박이말이라고 생각해도 상관없습니다. 애초에 순수한 토박이말이라는 건 드뭅니다. 어원을 모르는 말을 토박이말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토박이말이나 외래어나 그 말들을 익히는 데 본질적인 차이는 없습니다.

한국어의 정확한 사용법은 한국어의 다양한 사용 맥락을 자주 경험함으로써, 그리고 한국어 어휘가 가리키는 대상에 대한 정확한 지식에 의해 익혀지는 것이지 반드시 어원에 대한 지식으로 얻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말의 뜻은 자꾸 변하기 때문에 현재의 뜻이 어원의 뜻과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물론 어원을 아는 것은 도움이 됩니다. 어원을 알면 단어의 의미를 쉽게 이해하고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관련 어휘를 쉽게 익힐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한자 교육을 주장하는 분들의 대표적인 논거이기도 합니다.

다만 이것은 한국어를 모어로 배우는 한국인보다 한국어를 외국어로 배우는 외국인에게 더 중요한 일입니다. 한국어가 모어인 한국인은 ‘학자’라는 단어가 원래 [배우다+사람]이라는 두 가지 뜻이 합성하여 이루어진 것을 모른다 해도 그것을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한 덩어리 말로 이해합니다. 한국인은 한자에 기원을 둔 한국어 어휘도, 토박이 어휘와 구별하지 않고, 그렇게 배웁니다. 이를테면 ‘강아지’라는 말을 세 마디로 분석하지 않고 한 덩어리로 배우듯 ‘발명’이라는 말도 한 덩어리 말로 배우는 것이지요. 한국인은 워낙 많은 시간 동안 모어 어휘를 만나고 사용하기 때문에 그 기원을 살피고 분석하지 않아도 다 그 뜻을 다 이해하고 잘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어를 한국인처럼 접하지 못한 외국인이라면 사정이 다릅니다. 그들이 한국어 어휘를 빠르게 효과적으로 익히려면 한국어 어휘의 한자 기원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점은 한국인이 영어를 배울 때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영어 어휘에도 라틴어나 그리스어에 기원을 둔 어휘가 70%쯤 됩니다. 한국어 어휘에서 한자 기원을 가진 어휘가 70%쯤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한국인이 영어 어휘를 효과적으로 익히려면 그것들의 어원을 아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예컨대 suicide의 라틴어 기원이 sui+cide라는 것을 알면 homicide, insecticide, regicide 와 같은 관련 단어들을 쉽게 이해하고 오래 기억할 수 있을 뿐 아니라 -cide로 끝나는 처음 만나는 말도 그 뜻을 짐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어원을 안다는 것과 어원이 되는 한자를 배운다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한자에서 온 한국어 어휘의 어원을 아는 것이 도움이 된다 하더라도 반드시 한자를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권선징악’이라는 말을 잘 알기 위해 그 말이 [권하다+좋은 행위+벌하다+나쁜 행위]는 뜻을 가진 네 마디 말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아는 것은 필요하지만, 그것의 한자가 勸善懲惡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몰라도 그 단어를 사용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이것은 외국인이 한국어를 배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의 뜻만 알면 되지 반드시 한자까지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박진감’이라든가 ‘친람’과 같은 어려운 말이나 ‘안와’, ‘비강’ 같은 전문 학술 용어, ‘삼고초려’, ‘사면초가’와 같은 고사성어도 사전을 찾아 정확한 뜻풀이를 알면 됩니다. 다른 일들에 투자해야 할 시간이 더 필요하고 한문이나 일본 글을 배울 계획이 없다면 말입니다.

영어의 경우, 어휘의 70%가량이 라틴어 등에 기원을 두고 있지만 사용하고 있는 문자가 모두 로마자이기 때문에 어원을 알기 위해 기원 언어의 문자를 따로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문자는 같더라도 기원 언어의 형태가 현재 언어와 같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경우 일상적인 목적을 위해서는 기원 언어의 뜻만 알면 되지 반드시 기원 언어의 형태까지 알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Q. 그렇다면 결론은?

A. 높은 수준의 독서를 하고 우리말을 더 잘 구사하기 위해 한자를 배우고 싶다면 배우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다고 한자를 배우지 않고서는 높은 수준의 독서나 우리말 구사를 잘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아도 됩니다. 한자를 배우지 않아도 독서를 많이 하고 필요할 때 사전을 찾아보는 버릇을 익히면 얼마든지 높은 수준의 책을 읽을 수 있고 한국어를 잘 구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불안하면 본격적인 독서를 시작하게 되는 고등학교 때의 어느 시점에서 한두 달쯤 시간을 내어 집중적으로 2000자 정도의 한자를 익히면 됩니다. 2000자 정도면 충분합니다. 한문 공부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기본 뜻만 알면 됩니다.

한자를 배울 것인가 말 것인가는 각자가 안게 될 기회비용, 학습 부담 여부를 따져서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마다 관심 분야가 다르므로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판단은 불가능합니다. 위에서 요약해 본 질문-답변의 내용을 참조해서 각자의 관심과 필요가 기우는 방향으로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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