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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Clockwork Orange (1971)

제목을 중심으로 읽어 보는 세계문학: [시계태엽 오렌지]

기이한 제목을 가진 문학 작품들이 많습니다. 제목의 뜻을 헤아리기 힘들 때가 있습니다. 가령 [시계태엽 오렌지 A Clockwork Orange]라는 작품도 그런 경우에 해당합니다. 이 작품은 영국 작가 앤서니 버지스(Anthony Burgess, 1917-1993)가 1962년에 발표한 소설로 그를 단숨에 세계적인 작가로 만들어준 작품입니다. 그런데 제목만 가지고는 도무지 이 소설이 무슨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지 짐작하기가 어렵습니다. 작가는 왜 이렇게 이해하기 힘든 제목을 붙인 것일까요? 지적 취향을 과시하고 싶어서? 아닙니다. 책을 읽고 나면 독자는 작가가 왜 그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제목을 붙였는지 이해가 됩니다. 그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인간 사회의 어떤 부정적 모습을 묘사하기 위해 그러한 제목을 붙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긴 해도 한국어 독자에게 이 제목이 더 어렵게 여겨지는 데는 번역의 문제도 있을지 모릅니다.

디스토피아

소설 [시계태엽 오렌지]는 서구 사회가 가까운 미래에 맞닥뜨릴지 모를 하나의 가상 디스토피아(dystopia)를 그리고 있습니다. 이 세계는 삶의 퇴폐가 극단에 이르고 폭력이 만연한 어둡고 무서운 세계입니다. 청소년들은 합법적으로 마약 음료를 마시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잔인한 폭력을 행사합니다. 국가는 효율성을 앞세워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이 사회의 폭력과 악을 다스리려 합니다. 작가는 이런 사회를 통해 인간 본성과 문명의 성격에 내재한 폭력성을 극적으로 드러냄으로써 그것을 문제화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 소설을 읽은 많은 독자들이 소설을 가득 채운 엽기적 폭력에 경악하였지만 대부분 비평가들은 이 작품의 문제의식과 철학적 관점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2005년 미국의 [타임]지는 이 소설을 1923년 이후 가장 잘 쓰인 100대 영어 소설에 포함한 바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영화 감독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이 만든 같은 제목의 영화가 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소설의 번역이 이 영화의 수입보다 늦었기 때문입니다. 1971년에 나온 큐브릭의 영화는 감독의 작품 해석 방식과 충격적인 시각적 효과 때문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부정적인 반향도 컸습니다. 이 영화가 나온 뒤로 미국의 일부 고등학교에서는 이 소설을 금서목록에 넣기도 했습니다. 버지스는 큐브릭의 영화가 소설의 취지를 오해하게 만들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큐브릭의 영화는 인기가 높았고 버지스의 소설이 널리 알려진 것도 얼마간 영화의 덕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폭력이 편재하는 사회

소설의 이야기는 소년원 전력이 있는 15세 소년 알렉스의 내레이션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독자를 항해 자신의 지난 삶을 설명하는 듯한 독백 투의 이야기입니다. 알렉스와 그가 이끄는 세 소년이 보여주는 폭력 행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마약에 찌들어 사는 이들 패거리는 길거리 행인을 내키는 대로 두들겨 패고, 상점을 강탈하는가 하면, 차를 훔쳐 타고 교외의 어느 저택에 침입하여 남편이 보는 앞에서 부인을 윤간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도 그들은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폭력의 쾌락을 즐기는 듯합니다. 알렉스는 그에게 불만을 품은 제 패거리의 모함에 넘어가 어느 집에 물건을 훔치러 갔다가 잘못하여 주인을 죽이게 되고 경찰에 붙잡히게 됩니다. 그는 14년 징역형을 받게 되는데 교도소도 바깥 사회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곳에서 알렉스는 갖가지 폭력에 시달립니다.

폭력적 본성의 폭력적 억압

img-clockwork-orange교도소 생활을 견디지 못한 알렉스는 당국에서 실험 중이던 루드비코 프로그램에 자원합니다. 이 프로그램은 약물과 조건반사적 훈련을 통해 폭력 충동을 억제하는 정신 치료법입니다. 알렉스는 프로그램을 통과하여 석방되는데 바깥 사회는 순치된 알렉스를 그냥 두지 않습니다. 그는 경찰이 된 이전의 패거리 동료로부터 폭행을 당합니다. 폭행당한 알렉스는 우연히 이전 자기 패거리가 부인을 강간했던 남편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알렉스를 알아보지 못한 이 남편(그는 우연히도 소설을 쓰는 작가입니다)은 인간성을 말살하는 실험물로 전락한 알렉스를 반정부 선동을 위해 이용하려고 합니다. 알렉스는 작가와 그 동료들이 감금한 방에서 음악으로 조건화된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 버리려고 건물에서 뛰어내립니다.

이야기의 결말: 미래는 비관적인가

투신 뒤 간신히 목숨을 건진 알렉스는 “조건화”를 벗어나 원래의 제 상태를 회복하게 됩니다. 그가 원래의 제 상태를 회복하게 된다는 것은 다시금 폭력의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는 비행 청소년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 소설은 3부 21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 부가 7장씩입니다. 마지막 장에서 18세가 된 알렉스는 폭력이 조금씩 피곤한 일처럼 여겨지기 시작합니다. 평범한 삶에 대한 갈망도 생깁니다. 철이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작가는 결말 부분에서 알렉스의 변화 가능성을 암시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출판사는 소설의 이러한 결말이 주제를 약화시킨다고 보고 작가에게 마지막 장을 빼자고 제안합니다. 작가의 동의에 따라 이 소설의 미국판은 알렉스의 변화 가능성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암울한 미래상을 더 강조하는 효과를 얻게 됩니다.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도 미국판의 결말을 따릅니다. 1986년 이후에야 이 소설은 미국에서도 마지막 장이 추가된, 원래의 모습대로 출판되기 시작합니다.

자유의지의 문제

이 소설은 인간에게 내재한 폭력적 충동을 방치할 경우 인간의 미래는 공포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인간의 폭력 성향은 오늘의 삶에서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느냐가 인류의 과제일 것입니다. 작가는 인간의 파괴적 충동을 루도비코 프로그램과 같은 방법으로 다스리는 것이 과연 윤리적으로 옳으냐 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폭력성을 제거하기 위해 인간됨의 중요한 본질인 선택의 자유까지 말살하는 것이 옳으냐 하는 것입니다. 선한 행위는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에 의한 것일 때만 윤리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선택을 할 수 없는 사람을 인간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인간 정신의 세뇌와 인간 행위의 조건화야말로 또 하나의 폭력이 아니냐, 는 것이 이 소설이 묻고자 하는 질문입니다.

폭력과 예술, 파괴와 창조의 역설적 관계

폭력을 좋아하는 알렉스가 베토벤의 음악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기이하게 여겨집니다. 하지만 이것이 비현실적인 설정은 아닙니다. 잔인한 나치 장교 가운데 베토벤과 모차르트 애호가들이 많았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폭력과 예술의 깊은 상관성을 암시합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문화와 예술이 인간의 파괴적 본성을 승화시킨 결과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렇게 볼 경우, 인간에게서 폭력성을 제거하면 그와 함께 문화와 예술의 창조적 에너지를 말살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루드비코 요법으로 폭력성이 제거된 알렉스가 음악을 즐길 수 없게 된 것처럼 말입니다. 모순적으로 보이는 알렉스의 성향을 통해 작가는 인간의 폭력적 성향과 예술적 충동이 같은 뿌리를 가진다는 인간 문화의 역설과 아이러니를 이야기합니다. 문제는 파괴적 본능을 창조적 에너지로 승화시키는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하는 인간 문명의 혼란입니다.

기계처럼 작동되는 인간: A clockwork orange

img-clockwork이 소설이 제기하는 핵심적 질문은 약물과 조건화 훈련으로 순치되어 반사적으로 행동하는 알렉스가 진정 인간이라 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소설의 제목 “A Clockwork Orange”는 기계처럼 작동하는 알렉스의 상태를 상징하는 표현입니다(이 표현은 알렉스 일행이 강간한 여자의 작가 남편이 쓰고 있던 소설의 제목으로 나오고 그 뜻도 여러 곳에서 설명됩니다). 오렌지는 살아 있는 생명체입니다. 그런데 오렌지가 기계장치로 움직인다면 이 오렌지를 생명체라고 말하기 어렵게 됩니다. 교도소에서 나온 알렉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프로그램에 의해 선택의 자유가 제거되어 기계처럼 작동하는 존재입니다. 기계장치로 움직이는 오렌지 같은 존재인 것입니다.

제목의 우리말 번역: “시계태엽 오렌지”

이 소설의 제목을 우리나라에서는 “시계태엽 오렌지”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번역 제목은 얼른 이해되지 않습니다. 원래의 영어 표현인 a clockwork orange보다 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표준 영어에 이 표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영어권 사람들은 이 표현을 우리보다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표현으로 clockwork universe라는 표현이 이미 널리 쓰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표현은 창조주가 우주를 시계장치, 또는 기계장치처럼 움직이게끔 설계했다는 뉴턴의 기계론적 우주론에서 나왔습니다. 이 표현은 우리말로 흔히 ‘시계장치 우주’라는 말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버지스의 이 소설도 우리말로 “시계장치 오렌지” 또는 “기계장치 오렌지”라고 번역되었더라면 더 이해하기 쉽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뜻이 약간 멀어지기는 하지만 “태엽 달린 오렌지”라고 번역했더라도 “시계태엽 오렌지”라는 번역보다는 덜 기이하게 여겨졌으리라 여겨집니다. 실제로 프랑스에서는 이 소설의 제목에서 ‘시계’라는 말을 빼버리고 “기계로 작동되는 오렌지(L’Orange mécanique)”라는 식으로 번역하고 있기도 합니다.

A clockwork orange라는 표현은 작가가 어느 날 런던의 술집에서 들은 말이라고 합니다. 원래 표현은 ‘기계장치로 만들어진 오렌지처럼 기이하다(as queer as a clockwork orange)’라는 말이었는데 런던의 일부 계층이 사용했던 속어였던 모양입니다. 작가는 그 표현이 자신의 주제를 잘 나타낸다고 생각하여 제목으로 삼았다 합니다.

이 소설의 한국어 번역 제목이 “시계태엽 오렌지”가 된 것은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가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번역되어 개봉되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영화 제목 번역자가 별 고민 없이 그냥 “시계태엽 오렌지”라고 번역해 놓았는데 그 제목이 너무 알려져 소설 번역자도 다른 말로 번역하기 어려웠을 수 있습니다. 영화 제목 번역자는 clock이라는 말에 너무 집착하고 시계는 태엽이 중심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번역한 듯합니다. 틀린 번역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우리말 어법으로는 어색하고 영어 표현보다 더 직관적 이해가 어렵다는 점에서 아쉬운 번역으로 여겨집니다. (필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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