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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이 글은 인페르노 특집 시리즈의 일부입니다.
[유의] 이 글에는 소설의 중요 내용과 결말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신곡은 왜 신곡이지?

단테 알레기에르가 쓴 [신곡]의 제목이 왜 “신곡(神曲)”일까? 번역된 이 제목, 무슨 뜻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정확하게 무슨 뜻일까, 하고 생각해 본 사람들이 꽤 될 것이다. 영어 제목은 The Divine Comedy이고 원래의 이탈리아어 제목은 La Divina Comedia이다. 번역과 원제를 비교해 볼 때 “신곡”의 “신”자는 divine/divina와 대응시켜 대충 이해가 된다. 한데 그게 신성하다는 뜻인지 신에 관한 것이라는 뜻인지는 모호하다. “곡”자 부분은 더 이상하다. 이건 필경 comedy/comedia라는 말을 번역한 것일 터이다. 그런데 원제의 이 말은 희극이라는 말이 아닌가? 희극이라니. 엄숙한 종교적 주제를 다룬 서사시가 왜 희극이란 말인가? 왜 그게 “곡”으로 번역되었지? 희극이란 말은 어디로 사라졌어?

“신곡”이라는 번역 제목은 일본에서 나온 것이다. 일본어 위키피디아를 보면 단테의 이 작품을 맨처음 “신곡”이라고 번역한 사람은 모리 오가이라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 사람이 안데르센의 작품 [즉흥시인]을 번역하면서 그곳에서 소개되는 단테의 작품을 “신곡”이라고 번역했는데 그게 널리 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번역자들도 그 번역이 간결하고 적절하다고 여겼던 것 같다. 한국에서도, 모든 것을 늘 무반성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처럼, 그 번역 제목 역시 무반성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한국어 번역도 “신곡”이 되었다. 심지어는 중국에서도 그 제목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아시아 3국이 똑같이 “신곡”이라는 번역 제목을 사용한 것이다.

사실 단테가 자신의 작품에 붙인 원래 제목은 그냥 “단테 알리기에르의 코메디아(La Divina Comedia di Dante Aleghieri)”였다. 코메디아란 요즘의 코미디, 혹은 희극에 해당하는 말이다. 하지만 중세에는 약간 다른 개념을 가진 말이었다. 요즘처럼, 기쁠 “희(喜)”자가 암시하는 대로 웃음을 유발하는 이야기 줄거리를 가진 극이 아니었다. 중세의 코메디아는 웃음과는 무관하게 그냥 “해피 엔딩”을 가진 이야기를 가리켰다. 주인공이 처음에는 슬픔을 겪지만 결국은 행복한 결말에 이르는 이야기 줄거리를 가리켰던 것이다. “극”의 형식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 형식까지 다 포함하는 말이었다. 상대적인 개념으로 트라제디아(tragedia)라는 것이 있었다. 이것은 주인공의 운명이 좋은 상태에서 나쁜 상태로 추락하거나 결국에는 죽고 마는 극이나 이야기를 가리켰다. 오늘날 트레지디(tragedy) 또는 비극이라고 부르는 장르가 그것이다.

하여간 단테가 코메디아라는 제목을 붙인 건 그의 종교적 이야기 시가 행복한 결말에 이른다는 것을 겸손하게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후에 그 작품을 읽고 감명을 받은 보카치오는 그걸 그냥 “단테 알레기에르의 코메디아”라고만 부르는 건 부족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 위대한 문학적 성취를 찬양하는 의미에서 작가의 이름은 빼고 그것을 거룩한 코메디아, 혹은 성스러운 코메디아라고 불렀는데 그것이 바로 후대의 제목으로 굳어져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저러나 “디비나 코메디아”라는 작품의 제목을 번역해야 했을 때 일본 번역자는 적지 않은 고심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코메디아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던 아시아 문화권에서 그 말을 번역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19세기 이래 수입된 서양의 comedy와 tragedy 개념은 희극과 비극이라는 말로 그럴 듯하게 번역되어 있었다. 하지만 다른 개념과 범주를 가진 중세의 코메디아를 근대극의 대표적인 장르를 나타내는 용어로 옮기기는 어려웠다. 희극이라는 용어는 곧장 웃음을 유발하는 극 형식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물론 희극/비극이라는 말이 극 형식이 아닌 것에도 비유적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희극의 경우, 웃음을 유발한다는 이미지가 너무 강하다. 그래서 일본 번역자는 희극이라는 용어 사용을 포기하고 그냥 “노래”를 나타내는 “곡(曲)”자를 사용하기로 했던 것 같다. 이 “곡”자는 중국,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 문화 전통에서 시문학의 한 장르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어 왔으니 그럴 듯한 역어 선택이라고도 볼 수 있다(우리 문학에서 “사미인곡”이라고 할 때의 그 “곡”과 비슷한 뜻으로). 단테의 코메디아도 시문학 영역에 속하는 작품이었으니까 말이다. 다만 이 번역에는 행복한 결말의 이야기라는 개념은 들어 있지 않다. “곡”자의 사용은 이 작품이 웃음을 유발하는 이야기가 아님을 확실히 해주고 있지만 행복한 결말의 이야기라는 것을 전하는 데는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하기야 번역에서 모든 것을 옮기기는 어렵다.

보카치오가 나중에 붙인 divina라는 말의 번역은 어떤가. 이 말은 “거룩한”, 또는 “신성한”이라는 말로 번역해서 크게 무리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일본어 번역자는 그렇게 번역하지 않고 그냥 “신(神)”이라는 말을 붙였다. 코메디아를 한 음절의 한자말 “곡”으로 번역하고 나서 그에 어울리는 말을 찾다가 같은 한 음절의 한자말 “신”자가 어울리지 않겠느냐고 생각한 것 같다. “신곡”이라고 하면 간결해 보여 좋다. 그런데 divina라는 말이 “신에 관한” 주제를 나타낸다고 이해하고 “신곡”이라는 번역 제목이 “거룩한 노래”가 아니라 “신의 노래” 또는 “신에 관한 노래”라는 뜻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는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심오한 종교적 주제를 다루긴 했지만 단테의 이야기가 직접적으로 신에 관한 이야기라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여간 단테의 작품 제목 번역은 아직까지는 대안이 나오지 않고 있다. 널리 알려진 작품의 경우 일단 특정한 번역 제목이 독자 일반에 받아들여저 유통되고 나면 다른 제목으로 바꾸기가 쉽지 않다. 설사 유통되고 있는 제목에 명백한 오류가 있다 해도 그렇다. 잘못된 번역임에도 끈질지게 유통되고 있는 대표적인 작품 제목은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같은 경우다. 다른 역자가 제목을 바꾸고 싶어도 출판사에서 고개를 내젓는다. 상업적인 이유가 가장 크다. 제목을 바꾸면 다른 작품으로 오해받아 판매가 안 되기 때문이다. 단테의 작품 제목 번역 문제를 놓고도 한국의 번역자들 사이에서 고민이 있었던 듯하다. 민음사의 [신곡]을 번역한 박상진 교수는 작품 해설에서 제목 번역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고 있다. 일본에서 건너온 “신곡”이라는 제목을 극복하고 싶지만 어렵다는 것이다. “희극”이라는 말은 아무래도 사용하기 어렵고 차라리 코메디아라는 말을 그대로 쓰는 게 낫지 않느냐는 게 그의 생각인 모양이다. 하지만 결국 [신곡]이라는 말을 버리지 못하고(출판사에서 난색을 표했을 것이다) 그냥 “단테 알레기에르의 코메디아”라는 말을 함께 쓰는 것으로 타협하고 만다.

어느 강연 자리에서인가 원로 영문학자인 이상섭 교수가 지나가는 말로 단테의 이 작품을 “거룩한 희극”이라고 부르면서 자기는 “신곡”이라고 하면 귀신이 곡한다는 소리 같아 싫다고 한 적이 있다. 반은 농으로 한 말이지만 별다른 고민 없이 일본 번역을 그냥 빌려 써 온 한국 번역계의 풍토를 자조적으로 비판한 말일 것이다. 누구나 쉽게 이해되는 우리말 번역을 생각해 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사실 “신곡”이라는 말은 한자말에 익숙하지 않은 신세대에게는 “새로 나온 노래” 정도의 말로 들릴지 모른다(한글로만 쓰인 “신곡”이라는 말은 더욱 오리무중일 수 있다). 한자를 아는 사람들도 “신곡”이라는 제목을 보고 작품의 성격을 얼른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뭔가 “신곡”을 대신하는 제목이 나오는 것이 바람직하다. “거룩한 희극”이라는 말이 부담스럽다면 그냥 “거룩한 노래”라고 해도 알아듣기는 더 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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