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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이 글은 인페르노 특집 시리즈의 일부입니다. topa.co.kr/inferno
[유의] 이 글에는 소설의 중요 내용과 결말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인류 멸망의 묵시록적 비전

소재의 차원에서 말하자면, 이 소설은 일종의 종말론을 모티프로 삼은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인류의 문명은 갈 데까지 갔다. 인류가 발전시켜 온 문명과 기술이 이제 인류의 멸망을 재촉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현대인의 불안이 이 소설의 이야기를 가능하게 한 바탕이다. 종교적 종말론의 기본 근거가 죄와 타락이 깊어지고 널리 퍼진 현상이라면 세속적 종말론의 근거는 문명과 기술에 지나치게 의존해온 인류의 삶이 필연적인 결과로서 부딪히게 되는 생존 자원 고갈이다. 문명의 발달, 특히 의학과 의술의 발달은 인간 수명을 극적으로 늘려 걷잡을 수 없는 인구 증가를 가져왔다. 그래서 결국 인구 포화 상태는 자연의 제한된 자원에 존속을 의존해야 하는 인류 멸망을 불가피한 운명으로 만들어 놓았다. 과학자 조브리스트는 특단의 조처를 취하지 않는다면 인류가 1세기 안에 멸망하고 말 것이라고 예언한다. 멸망을 코앞에 둔 인류를 구원할 방법은 무엇인가?

종말을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조브리스트는 단테가 묘사한 “인페로노(지옥)”의 모습을 묵시록적 비전으로 제시한다. 여기에서 최첨단 과학 이야기가 중세의 종교 이야기와 결합한다. 예언을 믿게 하는 중요한 수단은 공포와 불안을 이용하는 것이다. 조브리스트는 인페르노의 영상을 보여주고 이 영상을 보게 되는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가 중세를 휩쓸었던 흑사병의 공포와 불안에 사로잡힌다. 중세의 흑사병이 인구를 줄여줌으로써 르네상스와 같은 뛰어난 시대가 등장할 수 있었다는 조브리스트의 궤변적 주장에 근거하여 랭던과 신스키는 조브리스트가 생각해 냈다는 유전공학적 아이디어가 세계 인구를 1/3로 줄이는 치명적이고 통제불가능한 질병일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

독자의 감정은 소설의 주인공들에 이입되어 조브리스트의 인류 구제 방법이 중세의 흑사병과 같은 질병을 퍼뜨리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미친 과학자 조브리스트가 보여주는 인페르노 이미지도 흑사병의 이미지와 유사하다. 그가 숨겨 놓은 바이러스를 파괴하지 않으면 24시간 뒤에 세계는 지옥이 되고 만다. 지옥의 문을 열게 될 바이러스의 위치를 암시하는 단서는 괴이한 동영상 하나뿐이다. 그리고 상징 해석의 전문가 랭던은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려 사건의 앞뒤 맥락을 알지 못한다. 랭던과 독자는 지옥 세계를 묘사한 고전의 구절과 보티첼리의 명화들이 암시하는 퍼즐의 통로를 따라 숨가쁘게 달릴 수밖에 없다. 반전이 있기 전까지 말이다.

이 소설은 어떤 점에서 과학이 야기한 문제를 과학이 구제할 수 있다는 주장에 동의하느냐고 묻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흑사병과 같은 고통스럽고 비극적인 자연의 방법이 아니라면 조브리스트의 방법이 윤리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해결책인가에 대해서 작가는 대답을 열어놓는다.

기호학 교수

이야기의 주인공은 이번에도 하버드의 기호학 교수 로버트 랭던이다. 이제 댄 브라운의 소설 주인공은 랭던으로 고정된 듯하다. 하기야 고전시대의 문화와 예술을 중요 소재와 배경으로 삼는 미스터리 스릴러물이라면 보통의 탐정급으로는 감당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사건의 퍼즐을 풀어야 하는 단서들의 수준이 높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퍼즐의 단서는 단테의 [인페르노]와 보티첼리의 그림들이고 랭던은 자신의 학문으로 축적한 지식을 이용하여 그 단서 조각을 맞추어 가면서 퍼즐과 같은 사건을 해결해야 한다.

24시간 액션

댄 브라운이 쓴 대부분의 소설은 24시간 안에 종결되는 액션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이야기의 배경으로 이용되는 역사적 시간은 더 길다. 이 소설의 경우 사건에 상징과 의미를 부여하는 시간은 중세까지 거슬러 가고 1세기 뒤의 미래까지 확장된다. 하지만 실제 사건이 일어나는 현실의 시간은 하루 24시간이다. 이미 일어난 사건의 시간들은 플래시백으로 처리되어 있다. 24시간 액션은 긴박감과 스피드가 생명인 미스터리 스릴러에서 흔하게 도입되는 방식이다. 이 24시간 액션 기법은 서양 고전극의 “3일치(three unities)” 전통과도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주로 무대 공연 기술의 제약과 관객의 몰입 유지 방법을 고려한 데서 성립된 규범이었다. 무대 기술이 발전한 근대 이후의 극, 그리고 무대극과는 다른 장르인 소설과 영화는 그 규범으로부터 자유롭지만 극적 긴장과 몰입을 중요하게 여기는 액션은 여전히 24시간 액션 기법을 애용한다고 볼 수 있다.

기억 상실

미스터리 스릴러물에 흔히 동원되는 수법의 하나가 기억 상실이다. 주인공의 기억 상실은 자신의 앞에 닥친 현실의 대한 예측불가능성을 극대화함으로써 극적 긴장도를 높인다. 현실 이해의 토대가 되는 과거의 기억을 갖지 못함으로써 주인공의 앞에 놓인 현재와 미래는 온통 수수께끼와 암호 같은 것이 되고 만다. 다만 이 소설에서 랭던의 기억 상실은 [메멘토]의 주인공이나 [본 아이덴티티]의 본처럼 심하지 않다. 적어도 그는 자신의 신원과 학문적 지식에 대한 기억까지 망실하지는 않았다. 그래야 어려운 퍼즐을 풀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랭던의 기억 상실은 자신의 트라우마와 관계된 것도 아니라서 그 자체가 의미를 갖는 어떤 것은 아니다. 작가가 랭던의 곤경을 복잡하게 만들어 서스펜스 감을 증폭시키기 위해 사용한 하나의 장치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기억 상실의 모티프를 작가가 너무 쉽게 빌려온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이 기억 상실은 시에나가 짠 계획의 일부로서 그럴 듯하게 엮어진다. 기호학자가 겪는 곤경이라는 점에서는 적절하기까지 하다. 현실의 퍼즐을 풀어야 하는 부담이 두 배가 되기 때문이다. 보통의 미스터리 스릴러에서는 선악의 구분이 대체로 분명하다. 탐정이 범죄자를 쫓는다. 하지만 랭던은 자신이 쫓는 자인지 쫓기는 자인지를 모른다. 그는 조브리스트의 단서를 쫓으면서 동시에 국가기관으로부터도 쫓기고 암살자로부터도 쫓긴다. 주변의 모든 상황과 모든 인물이 그에게 해독해야 할 상징과 암호가 된다. 원하지 않게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고 자신의 원래의 삶을 회복하려면 그는 조브리스트가 숨겨 놓은 단서를 찾아, 그것이 안내하는 경로를 따라 최후의 장소에 도달하여야 한다.

반전

재미있는 이야기치고 반전 없는 이야기는 없다. 이 소설에도 반전이 있다. 그 반전이 여러 겹이다. 적어도 세 가지 반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시에나와 그 주변 인물들의 정체에 관련된 것이고, 또 하나는 랭던이 휩쓸리게 되는 사건의 정체와 관련된 것, 또 하나는 조브리스트가 제시하는 인페르노 영상의 의미와 정체와 관련된 것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 반전은 그럴 듯하다 할 만하다. 성공하지 못한 반전은 독자나 관객에게 진실을 알게 되었다는 느낌보다 허망한 느낌이나 속았다는 기분을 준다. 이 소설의 반전들에서도 허망하게 여겨지는 요소가 없지는 않다. 기억상실의 모티프를 이용한 플롯에서는 반전의 순간에 얼마간의 허망함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그건 어쩔 수 없다. 조브리스트의 인페르노 영상과 관련된 반전도 역시 속았다는 기분을 들게 만든다. 하지만 지옥과 같은 사태를 면하게 되었다는 안도감이 작가를 용서하게 해 준다.

단서가 주어지지 않아 예측 가능성이 전혀 없는 반전은 나쁜 것이다. 단서가 없다는 것은 사건과 행위가 합리성과 필연성에 따라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독자와 관객은 합리성과 필연성, 그것들이 구현되는 단서와 복선들을 통해 사건의 진행과 결과를 예측한다. 독서의 즐거움은 이 예측이 맞아 들어갈 때 얻어진다. 이때 예측이 너무 정확하게 맞아 들어가는 이야기는 재미가 없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재미있으려면 일부의 예측은 맞아들면서 중요한 예측은 확인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서스펜스를 유지하고 그럼으로써 독자나 관객의 관심을 지속적으로 붙들기 때문이다. 서스펜스는 독자의 무지를 환기시키며 사건과 삶의 진실에 대한 깨달음을 기대하게 한다. 작가는 플롯을 짜는 능력에서 독자의 예측을 다 허용하지 않을 만큼은 독자보다 우위에 있어야 한다.

댄 브라운의 이 소설에서는 반전을 예비하는 단서들이 첫 챕터에서부터 적지 않게 제시되는 편이다. 그걸 제대로 눈치 채지 못하였다가 반전 이후 앞 부분을 다치 들쳐 본 독자가 많았을 것이다. (시에나와 조브리스트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록한 부분에서 작가가 얼마나 교묘하게 반전을 위한 단서를 만들어 놓고 있는지 주목할 만하다. 작가가 특히 F-22의 성별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대명사의 사용을 피하고 있는 점을 주목해 보라.)

인페르노와 인페르노: 두 텍스트의 교직(交織)

텍스트의 의미를 풍부하게 하기 위해 작가들이 중요하게 겨냥하는 한 가지는 상호텍스트성이 자아내는 효과이다. 댄 브라운은 전형적인 대중문학의 장르인 미스터리 스릴러에 인류사의 대표 고전인 단테의 종교문학 텍스트를 교묘하게 짜넣고 있다.

조브리스트는 단테의 팬이다. 그는 단테가 목격한 지옥의 모습에서 인류 멸망의 이미지를 본다. 단테가 믿음의 길에서 방황하다가 타락과 죄의 결과를 지옥의 모습으로 목격하였다면 조브리스트는 잘못된 방향의 문명과 기술에 의존한 데서 비롯한 인구 과잉의 결과를 단테의 그것과 유사한 지옥의 비전으로 상상한 것이다. 플로렌스(피렌체)에서 추방당한 단테는 과학자의 세계에서 소외되고 추방당한 조브리스트와 겹친다. 유사한 비전과 소외의 경험을 통해 조브리스트는 자신과 단테를 동일시한다. 단테는 그의 선의와 영원한 여성의 힘으로 방황에서 구제받는다. 조브리스트의 운명은 이 지점에서 달라진다. 여성의 도움으로 힘을 얻는다는 점에서는 단테와 유사하지만 인류를 구원하는 자로서의 역할을 자임한다는 점에서 달라진다. 그는 인류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구세주의 역할을 모방하려 한다.

플로렌스는 단테의 장소이면서 조브리스트의 장소이다. 흑사병의 기억이 남아 있고 인페르노의 비전이 목격된 장소이다. 그곳은 흑사병 이후에 르네상스라는 찬란한 문화가 개화한 곳이다. 조브리스트는 인간 개조를 실현할 상징적인 장소로 플로렌스를 선택한다.

댄 브라운의 미스터리 스릴러 텍스트는 이처럼 단테가 노래한 성스러운 이야기 텍스트와 교직됨으로써 고풍스럽고 신비한 중세적 분위기를 얻는다. 의미와 상징이 풍부해지고 역사의 순환성을 암시하는 효과도 낸다. 고전이 보여주는 영상이 현실의 미래 역사의 비전과 중첩되어 예언의 힘이 강화됨으로써 묵시록적 공포와 불안도 증폭된다.

외면할 수 없는 인구 문제

이 책의 핵심 주제는 인구 과잉으로 인한 인류 종말의 가능성이다.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여 인류는 결국 재앙을 맞을 수밖에 없다는 맬더스의 인구론은 농업혁명을 통한 식량 증가를 예상하지 못해 폐기되었지만 댄 브라운은 조브리스트를 통해 인구 과잉의 종말 재앙론을 다시 들고 나온다. 다시 제시된 인류 멸망론은 맬더스의 이론처럼 엉성하지 않고 치밀한 과학적 관찰과 통계, 그리고 수학적 계산에 근거한 것이라 논박하기 쉽지 않다. 멸망까지의 시한이 1세기를 넘지 않는다. 오늘날 제기되고 있는 기후와 생태 문제, 자원과 에너지 문제는 결국 인구 문제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뾰족한 해결책이 없다. 세계 기구가 내놓고 있는 대책이라는 것들도 별 도움이 안 된다. 현재 대로라면 1세기 안의 멸망은 필연적이다. 우리는 멸망을 기다리고만 있을 것인가? 그럴 수만은 없다는 것이 조브리스트의 생각이다. 그는 인류가 멸망하기 전에 세계 인구를 현재의 1/3로 줄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윤리성을 고려하지 않은 끔찍한 학살과 유사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한 생각이 이 소설이 다루는 사건의 발단이 된다.

질병이란 무엇인가?

조브리스트는 질병과 의료의 의미와 기능을 새롭게 해석한다. 전통적 관점에 따르면 질병은 인간에게 고통을 주고 인간의 삶을 허약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나쁜 것이며 일종의 저주이기도 하다. 하지만 조브리스트가 보기에 질병은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이다. 또한 인구 증가를 억제함으로써 삶의 질을 높게 유지해 주고 장기적으로 인류의 존속에 도움을 주는 기능을 한다. 따라서 의학은 질병을 치료하여 인구를 증가시키는 데 기여해서는 안 된다. 의학은 오히려 질병을 만들어 내는 일을 해야 한다. 이 말은 인구 과잉의 위험을 강조하기 위한 일종의 수사적인 표현이긴 하다. 하지만 이러한 역설적 주장은 질병의 개념을 다시 생각하게 하고 있다. 질병이란 과연 무엇인가? 질병이라고 규정되는 현상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방법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 것인가? 의학의 관심과 방향은 무엇이어야 하며 의료의 방법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 문제도 아울러 제기된다. 이 소설의 기본 플롯은 의학과 의료의 기능에 대한 생각의 갈등을 중심으로 짜여 있다. 조브리스트의 새로운 생각과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 신스키의 전통적인 생각의 대립이 이 소설의 사건과 액션의 기본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소설의 결말에서는 등장인물들이 조브리스트의 새로운 생각을 어느 정도 수긍하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독자는 조브리스트의 의학관과 그의 실천 사이에 결국 모순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해야 한다.

유전공학의 윤리

이 소설은 무엇보다 유전공학의 윤리 문제를 둘러싼 한 미스터리 스릴러이다. 천재 유전공학자 조브리스트는 인류가 맞닥뜨린 인구 재앙의 위기를 유전공학 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세계보건기구의 소박하고 지지부진한 방법으로는 인류를 구원할 수 없다고 본다. 그는 인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의 DNA를 변형시킬 수 있는 바이러스를 만들고자 한다. 여기에서 유전공학을 둘러싼 윤리 문제가 발생한다. 유전공학의 긍정적인 면은 그것이 인간의 생물학적 기능을 강화시키고 질병의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부정적인 면은 그것에 잠재되어 있는 우생학적 가능성이다. 유전공학 방법은 결국 자연 과정에 개입하는 일이며 그것은 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용 능력에 따라 필연적으로 사회경제적 계급을 발생시키고 그 계급의 양극화를 심화시킨다. 또 시에나의 우려처럼 그 기술이 권력 기관의 수중에 들어갈 때 대중과 적대자를 지배하고 통제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조브리스트는 자신의 유전공학 기술을 이용하여 인류를 멸망의 재앙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고 믿는다. 랭던과 신스키는 그의 방법이 현재의 인구를 극적으로 감소하는 방법이라면 그것은 필경 끔찍한 생물학적 테러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필사적으로 막고자 한다.

트랜스휴머니즘?

트랜스휴머니즘은 실재하는 과학자 집단의 이념이다. 아마도 댄 브라운의 이 소설을 읽기 전에 이에 대해 알고 있던 독자는 많지 않았을 것이다. 이 소설의 핵심 캐릭터인 조브리스트는 트랜스휴머니즘을 신봉하는 과학자 집단의 일원임을 자처한다. 트랜스휴머니즘은 과학 기술로 인간을 더 낫게 만들어 결국에는 뛰어난 생물학적 기능과 능력을 가진 슈퍼인간을 만드는 것을 이상과 목표로 삼는다. 트랜스휴머니즘이 지향하는 세계는 말하자면 인간 중심의 유토피아 같은 것이다. 그 세계에서 인간은 병에도 걸리지 않고 오랜 수명을 누리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조브리스트의 이상에 모순이 발생한다. 그는 이 소설의 한 대목에서 의료가 질병을 치료하는 것에 반대하고 유전공학이 수명을 늘리는 데 반대하는 주장을 한다. 이것은 유전공학 기술을 이용하여 결함없는 포스트휴먼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트랜스휴머니즘과 모순된다. 조브리스트는 현재의 인구 과잉 상태로서는 포스트휴먼이 나오기 전에 인간이 멸망하게 되므로 포스트휴먼의 이상적인 시대의 도래를 위해서는 인간이 멸망하기 전에 유전공학 기술을 이용하여 인구의 1/3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윤리적 딜레마

작가는 책의 서두에 일종의 에피그램으로 출처를 밝히지 않은 한 문장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지옥의 가장 어두운 곳은 도덕적 위기의 시대에 중립을 지킨 사람들을 위해 남겨져 있다.”는 말이 그것이다. 이 말은 에필로그에서 랭던이 [신곡]의 한 구절인 것처럼 떠올리는 말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 말로 소설의 주제에 내포된 윤리 문제를 간결하게 압축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것은 소설 속에서 주로 조브리스트의 생각을 반영하는 말이다. 조브리스트는 오늘날 인류가 처한 상황을 도덕적 위기의 시대로 보고 시간이 갈수록 이 위기가 심화된다고 본다. 인구 과잉에 따라 삶이 핍박해짐으로써 단테가 말했던 7대 죄악이 더 일반화된다는 것이다. 이 상황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결단이 필요하다. 결단을 미루어 죄악이 심화되고 결국 멸망에 빠지게 해서는 안 된다. 조브리스트는 상황의 심각성을 알고도 결단을 내리지 않는 세계보건기구의 태도는 비겁하며 인류에게 오히려 해롭다고 생각한다. 그는 결단을 내린다. 그리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그의 방법이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는 문제로 남는다. 작가는 조브리스트의 행위에 대해 윤리적 판단을 보류한다. 그의 결단은 전통적으로 철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되어 왔던 도덕적 딜레마와 무관하지 않다. 전체를 위해서 소수를 희생하여야 하는가, 소수가 희생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어떻게 정당화되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이 이 딜레마의 핵심적 쟁점이다. 전체를 생각해야 하느냐, 아니면 개체의 생명과 권익도 보호되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는 공리주의 철학을 둘러싼 논의와 연관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공리주의적 판단이 어느 상황에서는 옳고 어느 상황에서는 그릇되다는 데 있다. 이 소설은 공리주의와 연관된 윤리적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게 하는 쟁점을 주요 주제로 삼고 있다.

조브리스트: 미친 과학자인가 영웅적인 구원자인가

조브리스트는 전형적인 미친 과학자 캐릭터이다. 미친 과학자 전형은 많은 소설과 영화에 등장한다. 그는 천재 과학자인데 자신의 이상과 철학이 동료 과학자와 대중으로부터 이해 받지 못한다.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열정 때문에 동료와 대중으로부터 미쳤다는 취급을 받는다. 심지어 해악을 끼친다고 인식되기도 한다. 그는 소외되고 고립된다. 때로 악인으로 취급받는다. 자기 사회로부터 추방당하기까지 한다. 대부분의 대중 소설과 영화에서 이러한 캐릭터는 결국 대중의 몰이해에 분노하여 그들에게 복수하려 하고 자신의 능력을 이용하여 대중을 지배함으로써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하다가 결국은 자멸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광기에 사로잡힌 천재 과학자의 파멸은 그의 오만과 비윤리성 때문에 시적 정의(poetic justice)의 처벌 대상으로 정당화된다. 이 소설에서 조브리스트도 너무 뛰어나기 때문에 이해받지 못하고, 자기 사회로부터 왕따를 받는 과학자이다. 그런데 그의 소외는 인류 멸망의 길과 연결되어 있다. 그는 세인의 눈을 피해 자기의 믿음을 실천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그 행위의 결말은 여느 미친 과학자들의 이야기 결말과 대조된다. 다른 미친 과학자들은 분노의 광기로 대중과 대결하다 파멸하지만 조브리스트는 대중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고 그들을 구원할 방법을 마련해 준 다음, 그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해로운 적으로 여기는 대중의 손에 희생당한다. 그는 자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대중을 위해, 그들을 구원하는 구세주처럼 자신이 희생한다고 본다. 그의 믿음처럼 그는 과연 인류를 구원한 것일까? 아니면 그것은 그만의 오만한 생각일까? 이에 대한 판단은 독자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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