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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형래 씨의 영화 [디워]가 개봉되었을 때 영화의 질을 놓고 한동안 말이 많았습니다. 괜찮게 만든 영화라는 의견에서부터 형편없는 영화라는 의견에까지 평가가 다양했습니다. 컴퓨터 그래픽 기술 수준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가 있었지만 서사 구조에 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가 많았습니다. 부정적인 평가 가운데에는 영화의 결말이 터무니 없다는 지적이 가장 두드러졌습니다. 이때 일반인에게는 생소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비평용어가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이야기 결말이 비현실적이고 안이한 방식으로 처리되었다는 점을 비판하기 위해 동원된 용어였습니다. 이 용어는 그 뒤로도 영화 비평에 이따금씩 등장하고 있는데 일반인에게는 아직도 이 용어가 친근하지는 않습니다. 이 용어와 개념이 어떤 경우에 어떻게 사용되는지 살펴 봅니다.

기계장치에서 나온 신

오늘날의 문학 비평에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라는 말은 복잡한 문제적 상황이 뜻밖의 일로 아주 쉽게 해결되어 버리는 것을 비유적으로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사건이 인과관계의 필연적 귀결이라 여겨지지 않는 방식으로 마무리되는 수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수법은 오늘의 서사에서는 되도록 피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원래 이 말은 “기계장치에서 나온 신(god from the machine)”이라는 뜻의 그리스말을 라틴어로 옮긴 것으로 그리스 시대의 극에서 종종 사용하던 기법이었습니다. 신화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은 그리스 극에서는 인간이 해결하기 힘든 난경을 신이 등장하여 해결해 주는 수가 많았습니다. 신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그리스인들은 무대 위쪽에서 기중기 같은 장치를 사용하여 신이 내려오도록 하였습니다.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극비평가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이야기 결말 방식을 비판하였습니다. [시학]에서 그는 극의 이야기 구조가 내적 논리에 의해 짜여져야지, 개연성이 높지 않은 방식으로 짜여지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극을 통해 이야기가 현실처럼 여겨지는 효과보다 인간 삶에 개입하는 신의 역할을 강조하여 삶의 질서를 다스리려는 교육적 목적을 우위에 두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극 이야기의 “그럴 듯함”이 관객에게 불러일으키는 심리적인 효과가 극의 재미뿐만 아니라 교육적 목적에도 더 효과가 크다고 보았습니다.

시적 정의와 데우스 엑스 마키나

“데우스 멕스 마키나”의 수법은 그리스 시대 이후 많이 줄어들었지만 이야기를 비현실적으로 결말짓는 방식은 형식을 달리 하면서 아직까지 남아 있습니다. 이유는 그것이 문학적 이야기 속에서 “시적 정의(詩的正義 poetic justice)”를 실현시키는 편리한 방법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시적 정의”란 문학적 이야기 속에서 마땅히 실현되어야 한다고 여겨지는 정의를 말합니다(여기에서 “시적”이라는 말은 모든 문학 범주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문학의 이야기에서 선이 이기고 악이 패함으로써 언제나 정의가 실현되는 결과를 뜻합니다. 우리 식으로 말해 그것은 “권선징악”의 교훈을 가르치는 문학적 기능입니다. 문학의 이러한 기능에 대한 믿음은 어느 문화에서나 비슷합니다. 사회적 행동을 교육하는 문학에서 선이 악에 패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잘 짜인 이야기 속에서는 시적 정의가 사건의 내적 논리에 따라 실현되는 방식을 따릅니다. 그 방식이 그럴 듯하고 설득력을 가짐으로써 독자와 관객은 정의의 승리에 감동하고 그것을 믿게 됩니다. 그런데 허술한 구조를 가진 이야기에서는 이 시적 정의가 믿기 어려운 방식으로 실현되기도 합니다. 선악의 대결을 다루는 이야기에서 작가가 시적 정의를 실현시킬 수 있는 현실적인 논리를 찾지 못할 때 결말 부분에서 이야기의 인과적 필연성을 벗어나는 황당한 해결책을 동원하는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때 흔히 동원하는 방법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변형된 방식입니다.

리얼리즘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비현실적 허구에 대한 비판이 등장합니다. 리얼리즘이라는 사조가 그렇습니다. 리얼리즘은 두 가지 차원에서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거부합니다. 첫째는 사건 전개와 마무리가 내적 논리를 따르지 않는 비현실적 서사 구조를 거부합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여러 변형된 형식은 피하여야 할 대표적인 기법이 됩니다. 둘째는 현실의 진짜 모습, 곧 리얼리티를 보여주지 않는 이야기는 비현실적이라 하여 거부합니다. 문학이 반드시 시적 정의의 실현을 보여주는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현실에서는 선보다 악이 승리하는 경우가 더 잦기 때문입니다. 그와 함께 문학은 시적 정의보다 현실의 진정한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을 제 기능으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그것이 교육적으로도 더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강해진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본격문학에서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 기법뿐만이 아니라 시적 정의가 실현되는 이야기가 많이 줄어 들었습니다.

대중문학과 상업영화의 시적 정의와 해피 엔딩

하지만 “데우스 멕스 마키나”의 수법이 완전히 사라졌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문학의 중요한 기능이 시적 정의가 실현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여전히 남아 있고, 시적 정의의 실현 방식을 가장 손쉽게 보여 주는 방식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 기법이기 때문입니다. 이 기법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은 역시 교육적 목적이 강한 동화입니다. 서양 동화를 보면 마법에 걸려 잠든 공주는 늘 어디선가 나타난 왕자의 입맞춤을 받고 깨어나며, 나쁜 사람의 저주나 음모로 곤경에 빠진 우리의 주인공은 요정의 도움을 받아 곤경에서 벗어납니다. 우리 동화를 보면 어려움에 빠진 주인공은 홀연히 나타난 산신령이 구해주거나, 친절한 할머니가 준 이상한 구슬이나 우연히 얻은 부적으로 난제를 해결합니다.

동화에서뿐만이 아니라 대중문학과 상업영화에서도 시적 정의는 거의 언제나 실현됩니다. 그것이 독자나 관객을 만족시키는 중요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현실의 고달픔에 지치고 현실의 부정의에 불만을 가진 독자와 관객들은 문학과 영화를 통해서나마 정의가 실현되는 것을 기대하고, 정의의 실현이 가능하다는 생각에 만족합니다. 그리하여 시적 정의가 실현되는 방식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수법과 쉽게 결합합니다. 슈퍼 영웅은 착한 시민이 곤경에 빠졌을 때 늘 어디선가 나타납니다. 슈퍼 영웅처럼 노골적은 아니더라도 많은 대중문학과 상업영화와 드라마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와 같은 사건을 발생시키거나 인물을 등장시켜 정의를 실현합니다. 가난한 주인공이 누군가로부터 뜻밖에 거액의 상속을 받게 된다는지, 감당하기 힘들었던 악한의 치명적 약점이 우연히 발견된다는지 하는 경우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시적 정의가 실현된 이야기는 모두 해피 엔딩으로 끝납니다. 백설공주는 왕자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고, 흥부는 부자가 되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삽니다. 악당은 주인공의 총에 반드시 죽고, 우리의 경찰은 부패한 재벌이 저지른 추악한 범죄를 끝내 응징합니다. 이러한 시적 정의의 실현과 해피 엔딩은 우리에게 교훈과 위안을 주고, 희망과 믿음을 줍니다. 착한 사람은 보상을 받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교훈, 세상의 시련은 행복한 삶을 얻기 위해 치르는 일시적인 대가라는 위안, 그리고 착한 사람들이 지금은 비록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결국은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희망과 믿음이 그것입니다. 그런 위로와 희망이 없이 현실의 삶은 견디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시적 정의의 양면적 성격

justice시적 정의의 실현과 해피 엔딩의 이야기는 현실 삶의 고통을 견뎌내게 하는 기능을 합니다. 이것을 문학과 예술의 긍정적인 기능이라 볼 수도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위험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문학과 영화의 위로가 오히려 문제를 더 지속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시적 정의가 실현되고 해피 엔딩을 가진 문학과 영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의 부정의에 저항하게 하기보다는 그것이 어떻게든 절로 제거되리라는 낙관적인 기대를 품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오히려 현실의 문제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방식이 삶의 개선을 위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작가들이 많습니다. 본격문학을 하는 이들은 대체로 이편입니다. 물론 시적 정의가 실현되는 모든 이야기가 반드시 이처럼 부정적으로 기능한다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현실에서 정의가 실현되는 삶을 좀처럼 보지 못하는 독자와 관객에게 정의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것도 중요한 일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재너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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