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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 시기 가설에 대한 잘못된 믿음

한국 학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되도록 빨리 영어를 가르치고 싶어합니다. 되도록 빨리 가르치는 것이 영어를 숙달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아이들이 다 빨리 시작하기 때문에 경쟁에 뒤떨어지기 않기 위해서라도 빨리 시작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다 이른바 “결정적 시기(critical period)” 혹은 “민감한 시기(sensitive period)” 가설에 대한 믿음도 큽니다. 생물학적으로 언어 습득에 최적화된 시기가 있다고 보는 가설입니다. 태어난 때로부터 어린 시절을 거쳐 12-13세까지가 그 기간인데 이 기간에 어떤 언어에 충분히 노출되면 그 언어를 모어처럼 습득할 수 있고 그 기간을 넘기면 어려워진다는 것이 가설의 골자입니다. 영어 교육 학원과 출판업자들이 열심히 지지하고 강조하는 언어 교육 가설이기도 합니다. 한국 학부모들이 조기 영어 교육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 가설에 대한 굳은 믿음일 것입니다.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이 가설이 영어를 학교에서 “외국어”로서 공부하는 아이들이 아니라 영어를 날마다 실생활의 언어로 만나는 토박이 화자나 이민자 자녀들의 영어 습득과 관련된 가설이라는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어권의 토박이뿐만 아니라 그곳에 사는 이민자 자녀들은 삶의 필요에 따라 그 나라 언어를 모어 수준으로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들 교육에는 결정적 시기에 대한 고려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영어를 한국인의 삶에 필요한 만큼만 하면 되는 한국인은 영어권 이민자에게 필요한 수준의 영어를 목표로 삼을 필요가 없습니다. 한국인 학생을 대상으로 “결정적 시기 가설”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조기 교육을 권장하는 것은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불가능한 것을 권하는 무책임한 일일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 여러 면에서 큰 피해를 주는 일이 됩니다.

발음의 문제

한국의 학부모들은 자기 아이가 영어 토박이 화자처럼 유창하게 발음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혀가 굳기 전에 토박이 발음을 익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목표는 달성하기 불가능할 뿐 아니라 불필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아이는 하루 종일 토박이 발음을 들을 수 있는 이중언어 환경에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토박이 수준의 발음을 익힐 수 없습니다. TV로 토박이 발음을 들을 수는 있지만 다른 많은 활동을 포기하고 TV 앞에만 앉아 있을 수는 없는 일이고, 영어로 말을 나눌 수 있는 토박이 화자가 주변에 늘 있는 것도 아니어서 말을 제대로 익힐 수 없습니다. 유치원이나 영어 학원에서 토박이 화자 선생님으로부터 배우는 정도로는 토박이 발음을 익히기에 턱없이 모자랍니다.

토박이 발음은 한국인에게 불필요하기도 합니다. 한국인이 영어 발음을 토박이처럼 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영어 발음은 국제적 의사소통에서 상대방이 잘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의 정확성을 가지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것은 영어권 나라에서 사는 이민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어권 나라 안에도 온갖 액센트를 가진 발음이 있습니다. 상대방의 말을 잘 들을 수 있고, 하고 싶은 말을 막힘 없이 할 수 있으면 어떤 액센트를 가진 발음이든 문제가 없습니다. 영어를 유창하게 잘 한다는 것은 발음과는 무관합니다.

이른바 결정적 시기를 넘긴 이후에 영어 발음을 배우기 시작한다 하더라도 좋은 교사로부터 잘 배우면 훌륭한 발음을 얼마든지 익힐 수 있습니다. 늦게 배운 발음이라 하더라도 의사소통에 지장에 없으면 문제될 게 없습니다. 한국에서 영어를 외국어로 배우면서 영어권 토박이 발음을 익히려는 것은 잘못된 목표일뿐 아니라 불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거기에 들이는 시간과 노력은 다 낭비입니다.

어린 아이가 성인보다 영어를 더 빨리 잘 배울 것 같다고?

어린 아이가 성인보다 영어를 더 빨리 배운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유학이나 직장 관계로 미국에서 3-4년 거주했는데 초등학생 아이는 영어를 유창하게 하게 된 반면 부모는 여전히 영어를 더듬거리더라는 것입니다. 또 어린이는 자의식이 적기 때문에 영어를 빨리 배우는 데 비해 이른바 언어 자아(language ego)를 가진 성인은 오류를 의식하여 영어 사용을 주저하기 때문에 배우는 속도가 늦다는 가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착시 효과입니다. 아동과 성인이 동일한 조건에서 외국어를 배운다면 인지발달에서 훨씬 앞서고 세상 지식이 풍부한 성인이 당연히 외국어도 빨리 배웁니다. 언어 자아가 지장을 준다 하더라도 성인에게는 여러 면에서 그것을 상쇄할 다른 능력들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3-4년 거주한 초등학생이 부모보다 영어에 유창해지는 것은 영어로 생활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다는 것 말고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초등학생은 하루 종일 학교에 나가 영어로 생활하는 반면 유학생 부모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시간이 더 많습니다. 부모가 영어를 사용하더라도 학문과 관련된 내용이 대부분입니다. 따라서 일상 생활에 필요한 영어를 배울 시간이 초등학생 자녀보다 절대적으로 적은 것입니다.

어느 실험에서 아동 집단과 성인 집단을 대상으로 같은 조건에서 일정 기간 영어를 가르치고 그 결과를 평가한 적이 있습니다. 당연히 성인이 아동보다 더 좋은 성적을 냈습니다. 인지가 충분히 발달하지 않고 세상 지식이 적은 아동이 성인보다 외국어를 빨리 배운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조기 영어 교육은 뇌와 인지 발달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아이가 언어를 익히는 과정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습득(acquisition)과 학습(learning)이 그것입니다. “습득”이란 삶의 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체득되는 것이고, “학습”이란 교육의 과정을 통해 의식적으로 배우는 일을 말합니다. 이중언어 환경에서는 제2언어의 “습득”이 가능하지만 단일 언어 상황에서는 외국어를 의식적으로 “학습”해야 합니다. 문제는 의식적인 학습의 시기입니다. 그런데 뇌 연구자들은, 의식적인 학습 활동이 뇌가 아직 충분히 발달되지 않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면, 다시 말해 너무 이른 시기(6-7세가 되기 이전)에 이루어지면, 뇌에 과부하를 주어 뇌의 정상적인 발달에 지장을 준다고 경고합니다. 물론 일상 생활에서 절로 이루어지는 모어의 습득은 뇌에 도움을 주지만요.

뇌 회로가 아직 형성 중에 있는 어린 시절에는 뇌의 한 곳에 너무 스트레스를 주지 말고 뇌 회로를 고루, 그리고 충분히 발달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6-7세 이전에 공부에 필요한 뇌를 주로 쓰게 되면 그보다 먼저 발달하여야 할 정서와 감정의 뇌가 발달하지 못해 인성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뇌 연구자들은 다양한 인지 요소들이 필요한 외국어 공부는 인지적 융통성을 충분히 발달시킨 다음에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하고 있습니다. 언어를 관장하는 측두엽이 빠르게 발달하는 초등학교 입학 무렵에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는군요.

많은 전문가들이 조기 영어 교육은 뇌의 고른 발달을 희생시키는 일일 뿐 아니라, 효과도 크지 않고 피해만 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설사 영어를 일찍 배워 어린 시절 한동안 다른 아이들에 비해 영어 능력에서 앞선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자녀가 정서와 감정이 불안하고 창의성, 인간성, 도덕성이 뒤떨어진 아이로 자라는 것을 바라는 학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조기 교육의 효과는 미미하다

감성, 창의성, 도덕성 같은 것은 따지지 않고 일단 영어 실력으로만 보자면 어쨌든 일찍 배우기 시작한 아이가 경쟁에서 유리하지 않겠냐는 꽤 극단적인 주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수능 점수나 취업 시험에서 유리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럴 수는 있습니다. 다른 인지 요소, 다른 영역의 능력을 비교하지 않는다면 배움의 시간이 긴 아이가 영어를 조금이라도 더 잘하리라 기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일찍 배우기 시작했다고 해서 크게 유리한 건 아니라는 것이 여러 조사에서 밝혀지고 있습니다. 유치원부터 영어를 배운 학생과 초등학생 때부터 학교에서 영어를 처음 배우기 시작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고등학교 입학할 즈음에 영어 실력을 비교해 보니 그 차이가 아주 미미하거나 거의 없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기대한 만큼 경쟁에서 크게 유리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많은 노력과 비용을 들이고도 영어 실력 경쟁에서 뚜렷한 이득을 보지 못했다면 조기 교육을 받은 아이가 거기에 쏟은 노력과 비용만큼 손해를 보았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영어 공부를 하느라고 다른 공부와 활동을 할 시간을 빼앗겨 다른 능력에서 뒤떨어지게 되는 것도 손해입니다.

결론은 조기 교육이 여러 모로 이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조기 교육에 한 가지 내세울 점이 있다면 학부모들의 불안감을 없애 준다는 것과 다들 영어를 배우고 있을 때 자기만 영어를 배우고 있지 않는 데서 오는 소외감을 아이로 하여금 느끼지 않도록 해준다는 점 정도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신뢰하기 어려운 교육 이론과 상업주의의 부추김에서 오는 불안감과 소외감을 없앤다는 이유로 더 많은 것을 희생하고 손해보는 선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7-8세 때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학교 교과과정을 따라도 늦지 않다

많은 뇌 과학자와 외국어 교육 전문가들에 따르면 한국인 자녀의 영어 공부는 아이가 흥미를 가질 경우 초등학교 입학 무렵에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합니다. 물론 잘 짜여진 교육과정으로 이루어지는 교육이어야겠죠. 우리나라 교육부에서도 현재 초등학교 3학년에서 시작하는 영어 교육을 앞으로는 1학년부터 시작하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초등학교 3학년부터 시작해도 큰 문제는 없습니다. 학부모가 불안해 하지 않고 꿋꿋한 믿음만 가지고 있다면 그때 가서 처음으로 영어를 만나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아이의 영어 교육을 늦게 시작해도 문제가 없다는 것을 입증해 줄 사례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에 관한 조사 연구들이 있습니다. 또한 이전 교육 과정에서는 중학교 때부터 영어 교육을 시작하였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처음으로 영어를 배우기 시작한 지금의 성인들 가운데에도 영어를 유창하게 잘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영어권 나라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대학생들 가운데에도 영어 토박이 화자가 놀랄 만큼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요컨대 영어의 숙달은 교육과 학습의 방법, 그리고 개인의 관심과 열의가 더 중요하지 시기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인이 되고 나서 영어를 배우더라도 열의만 있다면 얼마든지 영어에 능통해질 수 있습니다. 제이티비시 방송의 “비정상 회담”이라는 방송 프로그램을 보면 거기에 출연하는 외국인들이 한국어에 놀랄 만큼 유창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성인이 되어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영어를 늦게 배우는 사람에게는 영어를 배우지 않았던 동안 다른 것을 배울 시간을 많이 가졌다는 이점이 있습니다. 그 시간에 발달시킨 인지 능력, 그리고 그 기간에 얻은 경험과 지식은 영어를 늦게 배우기 시작하더라도 영어를 더 빨리 배우는 데 도움을 줍니다. 언어는 다른 지식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걱정되어 빨리 영어를 알게 하고 싶다면 이것만은 기억하자

그래도 불안하여 빨리 영어를 익히게 싶다면 조기 교육의 문제점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아이에게 주어지는 학습 부담, 그 과정에서 다른 능력들을 발달시키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부정적 효과, 조기 교육에 투자되어야 하는 경제적 비용 등의 문제를 고려해야 합니다. 이러한 문제를 줄이면서 다음과 같이 할 것을 권합니다. 중요한 것은 욕심을 내지 않는 것입니다.

  • 아이가 흥미를 보일 때만 영어와 접촉하게 합니다. 관심을 보이지 않는 아이에게 억지로 영어를 주입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 가르치려 하지 말고 자연스러운 접촉을 통해 영어를 절로 습득하게 합니다. 자연스러운 접촉은 뇌에 스트레스를 주지 않습니다.
  • 영어를 가르치는 유치원이나 학원에 보내지 말고 집에서 영어에 노출시키는 방법(방송, 부모)을 택합니다.
  • 영어를 가르치지 않는 유치원을 찾을 수 없다면, 아이로 하여금 영어를 최대한 놀이처럼 여기게 합니다. 집에서는 복습이나 예습을 하지 않습니다.
  • 초등학교에서 가르쳐 주기 전까지 알파벳은 가르치지 않습니다. 자연스러운 놀이처럼 듣기와 말하기만을 합니다.
  • 영어와 접촉하는 시간을 너무 많이 잡지 말고 감정과 정서 발달에 필요한 다른 여러 활동을 충분히 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자녀 영어 교육 문제로 마음 쓰는 학부모가 읽으면 도움이 되는 책들

  •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기획, 어도선 서유헌, 이병민, 김승헌, 권혜경, 이찬승 [굿바이 영어 사교육] 시사IN북, 2012.
  • EBS ,언어발달의 수수께끼 제작팀 [언어발달의 수수께끼] 지식너머, 2014.
  • 이병민 [당신의 영어는 왜 실패하는가?] 우리학교, 2014.
  • KBS 읽기혁명 제작팀 [뇌가 좋은 아이] 마더북스, 2010.
  • 신성욱 [조급한 부모가 아이 뇌를 망친다] 어크로스,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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