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프라이드를 가지라”는 말을 듣습니다. 자신의 가치나 능력을 믿고 당당하게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pride는 보통 ‘자부심’이라고 번역하고 ‘자긍심’ 또는 ‘긍지’라고도 합니다. 자부심이나 긍지는 긍정적인 태도로 인식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권장되는 미덕의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어 ‘프라이드’의 경우는 좀 복잡합니다. 프라이드는 때로 악덕이 될 수 있습니다.
프라이드의 두 가지 뜻
pride에는 좋고 나쁜 뜻이 섞여 있습니다. “프라이드를 가져라”라는 말을 우리말로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라”고도 옮길 수 있는데 이때 우리말 ‘자랑’의 의미가 영어의 ‘프라이드’라는 말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말은 맥락에 따라 긍정적으로 들리기도 하고 부정적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자신의 가치와 능력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당당하게 여기는 태도를 뜻할 때는 긍정적인 말로 받아들여지는데 자신의 뛰어남을 남에게 과시하는 태도를 뜻할 때는 건방지고 오만한 태도를 보이는 말로 받아들여집니다. 영어의 프라이드가 바로 그렇습니다.
근대 이전의 프라이드: 위계적 세계의 윤리
영어의 프라이드는 근대 이전에는 부정적인 뜻으로 더 많이 쓰였습니다. 중세까지는 프라이드가 반드시 피해야 할 악덕에 속했고 특히 기독교 사회에서는 프라이드가 7대 죄악에 속했습니다. 7대 죄악 가운데 가장 큰 죄라고 여겨진 때도 있었습니다. 죄라고 여겨지는 프라이드를 우리말로는 ‘교만’, 또는 ‘오만’으로 번역합니다.
프라이드는 본래 개인의 뛰어난 능력을 나타내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탁월한 능력을 갖춘 사람은 그 탁월함 때문에 오만해지거나 교만해져서 자신의 본분을 잊을 수 있습니다. 자기보다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을 깔보거나, 제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면 불만을 품고 자신의 탁월성에 걸맞은 대우를 받고자 하는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근대 이전의 사람들은 이러한 프라이드를 가진 사람들이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주범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근대 이전의 서양 세계가 위계질서의 세계였던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근대 이전 서양 사람들이 가졌던 세계관을 학자들은 흔히 존재의 대연쇄(Great chain of being)라는 말로 부릅니다. 서양인들은 세계가 신을 정점으로 하여 그다음 천사들, 그다음 인간, 그리고 동물과 식물, 그리고 무생물 등의 순서로 지위가 정해져서 질서가 이루어진다고 보았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이 본 세계는 순서가 정해진 계급 세계였습니다. 순서나 계급을 나타내는 영어의 order가 동시에 질서를 나타내는 말임을 보면 그 세계관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모든 존재는 자기의 순서(지위)를 잘 지켜야 합니다. 왕은 왕의 지위를, 귀족은 귀족의 지위를, 그리고 농민, 목수, 노예도 그들의 지위와 본분을 잘 지켜야 세계의 질서가 잘 유지된다고 보았습니다. 누군가 자신의 지위, 또는 본분과 역할을 지키지 않게 되면 질서가 어긋나 disorder(무질서) 상태가 됩니다. 부품들의 복잡한 순서와 역할로 기능하는 기계의 부품이 제 자리를 벗어나면 고장(out of order)이 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위계질서의 사회에서는 낮은 지위에 있는 존재가 자기의 뛰어남을 과신하여 서열에 불복하고 윗자리를 탐내는 것이 가장 커다란 죄였습니다. 그러한 죄악으로써 사회의 질서가 무너진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금언은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세계 질서 속에서의 자신의 본분과 역할을 잊지 말라는 것이며 자신의 탁월성을 과신하여 신의 뜻을 거슬러서는 안 된다는 충고였습니다. 비극은 흔히 “너 자신을 알라”는 충고에 따르지 않고 교만한 마음 때문에 함부로 행동하는 뛰어난 사람들이 겪는 불행과 고통을 뜻하였습니다. 뛰어난 인간 오이디푸스의 비극도 한 사례입니다. 그리스 문화에서는 자기 본분을 망각한 이러한 인격적 결함을 휴브리스(hubris)라 불렀습니다. 휴브리스는 부정적인 의미의 프라이드에 해당하는 악덕이었습니다.
기독교 시대에도 계급 질서의 세계관이 지배하였습니다. 신 아래의 천사들 사이에도 9계급의 순위가 있었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화에서 볼 수 있는 대사건은 대천사 루시퍼가 신에게 도전한 사건입니다. 신의 총애를 받던 루시퍼는 어느 순간부터 신의 통치를 압제라 여기고 신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는 신의 징벌을 받고 천국에서 추방되어 지옥으로 떨어져 사탄이라 불리게 됩니다. 루시퍼, 혹은 사탄은 기독교 세계에서 교만의 대명사입니다. 교만한 마음이 드는 사람은 사탄의 유혹을 받은 사람이라 간주됩니다. 14세기에 이탈리아의 시인 단테가 쓴 [신곡]을 보면 교만의 죄에 빠진 이들에 대한 묘사가 상세하고, 같은 시대 영국의 시인 초서가 쓴 [캔터베리 이야기]에 보면 교만의 죄악에 대해 설교하는 신부의 장광설을 읽을 수 있습니다.
위계적 세계관의 균열과 낭만주의
근대로 넘어오면서 위계적 질서관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합리 정신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는 17세기 초에 나온 영국 시인 존 밀턴의 [잃어버린 낙원]이 그 균열을 보여줍니다. 이 종교적 서사시는 루시퍼의 반란을 주요한 소재로 다루고 있습니다. 밀턴은 자신의 작품에서 루시퍼의 몰락과 신의 승리를 이야기하기는 하지만 루시퍼를 다루는 그의 태도에서 변화된 질서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 루시퍼가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은 혐오의 대상으로만 그려진 것이 아니고 압제에 저항하는 번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영웅의 면모를 보이는 캐릭터로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18세기 말에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평등한 개인을 중시하는 시민사회의 기초가 형성됩니다. 그리고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낭만주의 운동과 함께 모든 존재의 가치가 동등하다는 생각이 등장합니다. 루시퍼가 영웅으로 칭송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프라이드는 더 이상 죄악이 아니고 개인의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미덕이 됩니다.
휘트먼의 Song of Myself
19세기 중반 미국 시인 휘트먼은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면 건방지기 짝이 없고 오만하기 짝이 없는 일대 선언을 합니다. “나는 나 자신을 찬양하고 나 자신을 노래한다”는 시를 발표한 것입니다.
근대 이전에는 ‘나’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을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문학의 대상은 위대한 인간이나 고귀한 인물이어야 했습니다. 평범한 인간은 경멸이나 조롱의 대상으로서만 문학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19세기에 들어서 낭만주의 시인들에 의해 ‘나’에 관한 이야기가 소재가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나’라는 존재를 찬양하고(celebrate) 노래한다는(song) 선언이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존재의 평등과 존엄함을 선언하고 경축하는 시적 선언이었습니다. 프라이드가 오만이나 교만이 아니라 자부심과 긍지로 새롭게 의미를 확립하는 순간이기도 하였습니다. 휘트먼은 인간 개인의 평등뿐만 아니라 생물과 무생물을 포함하여 모든 존재의 평등을 믿었고, 모든 직업의 평등을 믿었으며, 모든 종류의 사랑을 믿었습니다. 그는 프라이드를 주창한 시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프라이드
오늘의 세계에서 프라이드는 긍정적인 태도이자 미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탁월성을 자랑하고 남을 깔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개성이나 가치를 부끄럽지 않게 생각하고 남에게 종속되지 않으려는 자유의 정신을 상징합니다. 영어의 프라이드라는 말에 여전히 오만이나 교만의 뜻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이 말은 이제 자긍심을 나타내는 말로 더 자주 쓰이고 오만이나 교만을 경계하는 말이 필요할 때는 그와 대립하는 미덕인 겸양(humility)이나 겸손(modesty)이라는 말이 더 널리 사용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