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말은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뭔가 사연을 가진 표현으로 보입니다. 어디에서 유래한 말일까요? 왜 신록의 4월이 잔인하다는 거죠? 4월에 끔찍하게 나쁜 일이 많이 일어났던 것일까요?
사람들은 이 말을 한국의 역사적 사건과 관련하여 사용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젊은 학생들이 많이 죽고 다쳤던 4·19 혁명. 수만 명이 희생당했던 제주 4·3 사건. 세월호의 참사도 4월에 일어났습니다…. 정말 4월에 특별히 나쁜 일이 많이 일어났던 것일까요?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쁜 일이 때를 가리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보다는 한창 봄이 시작되는 때에 어떤 나쁜 일이 일어나면 배경이 되는 아름다운 계절과는 뚜렷이 대비되어 더 끔찍하게 여겨지는 나머지 그런 표현이 나온 게 아닌가 짐작됩니다.
T. S. 엘리엇의 “황무지”
사실 이 말은 한국에서만 사용되는 말이 아닙니다.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말이지요. 한 편의 시 구절에서 비롯하였습니다. 미국 태생의 영국 시인 T. S. 엘리엇(Eliot)의 유명한 시 “황무지(The Waste Land)”가 그 출처입니다. 그 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겨울은 따뜻했었다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어주고
가냘픈 목숨을 마른 구근으로 먹여 살려 주었다.
첫 행에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대목만으로는 그 말의 뜻을 정확하게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 뜻을 제대로 알려면 이 시 전체를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는 433행이나 되는 긴 시입니다. 시인이 직접 붙인 주석이 50개나 되는 어려운 시이기도 하고요. 핵심적인 주제를 요약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삶의 목적과 의욕을 잃은 사람들의 역설
4월은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드는’ 달입니다. 라일락뿐만 아니라 만물을 겨울잠에서 깨워 주는 달이죠. 그런데 왜 시의 화자는 이 소생의 4월을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부르고 있을까요? 화자는 이유를 다음에 설명하고 있습니다. 겨울이 우리를 따뜻하게 해 주었고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어주고 가냘픈 목숨을 마른 구근으로 먹여 살려 주었다.’는 겁니다.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봄보다는 겨울이 좋았다니까요. 눈이 대지를 덮어 세상의 고통과 더러움을 잊게 해주고 비축해 둔 식량으로 목숨을 연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랍니다.
이런 생각이 전혀 낯설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이 실제로 그러한 감정을 경험하니까요. 비유적으로 이야기하면 이런 경우입니다. 잘 자고 있는데 어김없이 아침이 찾아옵니다. 해가 떠서 창문을 밝힙니다.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 일하기 시작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아, 세상의 괴로운 일들 다 잊고 그냥 더 자고 싶습니다. 왜 아침이 오는지 모르겠습니다. 다 잊고 더 편히 자고 싶은 사람에게 아침 햇살은 어서 일어나라고 흔들어 깨우는 자명종처럼 잔인하기 짝이 없습니다.
엘리엇의 “황무지”는 20세기에 들어서 삶의 목적과 의미를 잃고 생명력을 가진 것을 생산해내지 못하는 서구인들의 정신세계를 묘사한 시입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말은 시인 자신의 말이 아니라 서구인의 마음속 넋두리를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그들의 넋두리를 그대로 옮김으로써 시인은 삶의 방향과 의욕을 잃은 채 살아 있으면서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이 사는 현대인의 정신적 황폐를 보여 주려고 한 것입니다.
원래의 맥락과는 동떨어진 어법이 된 “4월은 잔인한 달”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널리 회자되고 있는 “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말은 원래의 맥락과는 동떨어진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엘리엇의 시 구절에서 표현을 빌렸을 뿐 딴 뜻을 가진 말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엇이 “황무지”에서 묘사하려고 했던 것은 이 시대 우리 사회의 수많은 사람의 정신 상태에 대해서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