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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1일. 오늘 계획 중 한 가지는 망쳤다. 단풍 사진을 찍으려던 계획은 실패. P 님을 따라 한 달 전에 왔을 때만 해도 가는 길의 풍경이 아름다워 감탄이 절로 나왔다. 단풍 들 무렵이면 더 아름답다고 해서 일부러 때를 맞춰 시간을 냈는데. . . 올해 단풍이 예년처럼 좋지는 않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산들이 가뭄에 오랫동안 시달린 것처럼 회갈색 빛깔의 나뭇잎들로 뒤덮여 있다. 너무 늦게 온 것인가. 가는 길에 카메라를 꺼내 들 일이 없어지고 말았다. 계획 하나는 실패다. 또 하나의 계획은 양평 명달리에 있는 음악감상실 ‘까르페 더 뮤직’에 가는 일이었다. 두 개의 계획이 있었다기보다 단풍 좋은 날 명달리에 가서 음악 좀 듣고 오자는 계획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경치 구경도 하고 음악도 듣자는 것, 모처럼 시각과 청각의 즐거움을 위해 시간을 좀 쓰자는 계획이었다. 산중에서 음악과 사는 사람들의 특별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면 덤이 될 것이다.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명달리 176-9. 잠실교에서 올림픽대로로 들어서고 나서 40분 남짓 걸리는 거리이다. 서울춘천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서종IC 교차로에서 가평, 청평 방면으로 꺾어져 나간 다음 조금만 더 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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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가 보이는 길목에 들어서면서 다소 위안을 받았다. 맞은편 산의 빛깔이 오면서 보아온 산들보다는 낫다. 이곳엔 상록수가 많았다. 회갈색으로 변한 낙엽수들도 상록수들과 어울려 그런대로 볼 만한 풍경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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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따라가다 보면 왼쪽 언덕에 붉은 건물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이런 곳에 있을 집치고는 꽤 크다. 뒤로 아름다운 산이 자리잡고 있고 앞으로도 여러 겹의 산등성이가 한 폭의 그림처럼 포개져 있는 풍경을 마주한 곳이다. 길가에 집들은 없고 산기슭 여기저기에 드문드문 몇 채의 집들이 보인다. 농가처럼 보이지 않은, 예쁘게 지은 목조 주택들이다. 도시에 살던 사람들이 들어와 사는 집들로 보인다.

‘까르페 더 뮤직’.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면 무슨 레스토랑 같은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할 법한 건물이다. 레스토랑이 아니고 음악감상실이다. 왜 이런 한적한 곳에 음악감상실을 두었을까, 하는 의문이 떠오른다. 이런 곳이라면 주변의 불평을 걱정할 필요 없이 꽝꽝거리는 음악을 마음대로 들을 수 있기 때문? 그렇다 치더라도 이런 한적한 곳까지 음악을 들으러 오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 어떤 사람이 이런 곳에 저런 커다란 음악감상실을 짓고 사람들이 음악을 들으러 찾아오리라고 기대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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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의 나무기둥에 몇 개의 조그만 표지판들이 붙어 있다. 이곳의 위치를 알리는 도로표지판, 그리고 눈앞의 건물이 [전문 음악감상실 Carpe the Music 까르페 더 뮤직]임을 알리는 간판, 그리고 그 아래에 “매주 일요일은 정기 휴일”이라는 안내판. 오른쪽에 매달려 있는 우편함은 꽤 크다.

음악감상실 이름 ‘까르페 더 뮤직 Carpe the Music’은 라틴어와 영어의 조합이다. “까르페 디엠 Carpe diem” 이란 라틴어 성구에서 빌린 표현인 듯하다. “까르페 디엠”은 보통 영어로 Seize the day”라고 번역된다. 현재의 시간을 붙잡으라는 말이다. 또는 현재의 시간을 놓치지 말고 그 시간을 충실하게 살라는 말이다. 시간은 일회적이며 흘러가 버리면 다시 붙잡을 수 없다. 음악도 시간과 함께 흘러가 버리는 공기의 진동이다.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시간과 함께 흐르는 소리를 매순간 “붙잡아 음미하는 행위”라 할 수 있을까. ‘까르페 더 뮤직’은 그런 뜻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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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르페 더 뮤직’ 건물의 계단을 올라 출입문을 열면 카페 분위기의 휴게실에 들어서게 된다. 커피머신 같은 설비를 제대로 갖춘 본격적인 카페는 아니다. 음악 감상을 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커피나 차 한 잔씩을 대접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간단히 준비되어 있을 뿐이다. 저 오른쪽의 흰 문이 음악감상실의 입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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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입장료가 1만원이다. 1인당 1만원을 내면 커피나 차 한 잔을 대접받고 이곳 음악감상실에서 하루 종일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하루 종일 건물 안의 모든 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 건물 안에만 머물러 있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마음대로 들락거려도 된다. 한 시간쯤 다른 곳에 들렀다가 와도 된다. 보통은 두세 시간 머물다 가는 사람들이 많지만 한나절을 머물다 가는 사람도 드물지 않다고 한다. 점심 때가 끼인 시간에는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의 산채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와서 음악을 듣기도 한다. 가족이 오는 경우에는 음식을 마련해 와서 휴게실에서 먹는 이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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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감상실은 강당처럼 생겼다. 홀의 전면에 오디오 시스템이 놓여 있다. 오디오 시스템 뒷쪽 벽에 걸려 있는 모니터에 현재 나오고 있는 음악의 제목과 작곡가/연주가 등이 소개된다. 오디오 시스템을 향해 놓여 있는 의자가 20여 개. 특별한 초대 행사가 있는 날이 아니라면 보통 때의 고객 수효로 이 의자들이 동시에 다 차는 경우는 드물다. 그럼에도 이만큼의 의자를 마련해 놓고 싶었던 이곳 주인의 마음이 헤아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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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 오른쪽에는 음반들을 모아 놓은 방이 있다. 수많은 음반이 선반에 빽빽하게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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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 쪽 컴퓨터가 놓인 책상 앞에 이곳 주인 박상호 님이 모니터를 바라보며 앉아 있다. 그는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보낸다. 그는 수많은 음반에 둘려 싸여 행복하다.

음반이 1만2천장, 콤팩트디스크가 4천여 장이라 한다. 저 음반이 다 모이기까지의 세월을 짐작해 본다. 수십 년이 걸렸을 것이다. 저 음반과 오디오 시스템을 구입하는 데 들였을 비용을 생각해 본다. 알고 보면 저것들은 물질적 삶의 질을 높이는 데는 쓸모 없는 물건들이다. 사치일까. 아니 어떤 이들에게는 물질적 삶의 질을 희생한 대가로 얻어진 삶의 필수품일 수도 있다.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기를 구하는 데 소득을 다 써 버리는 바람에 평생 궁핍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드물지 않다. 행복한 삶의 기준은 한 가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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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청각에 쾌감을 주는 소리의 배열과 조직이다. 인간은 거기에 아름다움의 가장 순수하고 추상적인 형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다만 그 아름다움은 시간 속에서 사라져 버리는 아름다움이다. 인간은 사라지는 이 아름다움을 붙잡으려고 노력해 왔다. 인간 기술이 이제 그 아름다운 소리의 조직을 붙잡아 두고, 원할 때마다 되살릴 수 있게 해주었다. 저 오디오 시스템이 바로 그러한 인간 노력의 결실 가운데 하나다.

‘까르페 더 뮤직’을 찾은 사람들은 듣고 싶은 음악을 신청할 수 있다. 1만2천 장의 음반과 4천여 장의 시디에 신청한 음악이 없는 경우는 거의 없다. 클래식 음악만이 아니다. 고전이 된 대중음악도 충분히 갖추고 있다. 음악신청자는 연주자를 지명할 수 있다. 신청자가 연주자를 지명하지 않을 때는 디제이 노릇을 하는 박상호 님이 연주자를 선택한다. 다른 감상자의 신청곡이 없을 경우에는 듣고 싶은 음악을 거의 마음대로 들을 수 있지만 다른 신청곡이 대기하고 있을 때에는 한 사람이 3곡 이상을 신청할 수 없다는 것이 이곳의 규정이다.

오이스트라흐가 연주한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과 카를로 마리아 쥴리니가 지휘한 브람스의 교향곡 4번을 신청하여 들었다. 같은 음악이라도 연주자에 따라 감흥이 다르고 오디오 시스템에 따라 음질의 느낌이 다르다. 동행한 S는 팝뮤직 세 곡을 신청하였다. Lara Fabian의 “Je suis malade”와 “Adagio”, Beautiful South의 “Dream a Little Dream of Me”. 박상호 님은 같은 노래를 각기 다른 세 명의 가수가 부른 노래와 함께 틀어주었다. 세 곡을 신청하였는데 아홉 곡이 나왔다.

그 시간 홀에 앉아 있던 사람은 우리 일행 두 사람뿐이었다. 이 공간과 이 오디오 시스템에서 나오는 음악, 그리고 우리를 위해 대기하고 있는 박상호 님의 시간을 우리 두 사람이 온통 독차지한 셈이어서 호강스럽고도 미안했다. 우리가 감상실 안에 들어가기 전에 중년 부부 한 쌍이 음악을 듣고 나온 듯 휴게실에 앉아 담소하고 있기는 했었다.

‘까르페 더 뮤직’의 건물은 2층으로 되어 있다. 주된 공간인 음악감상실은 높은 천정을 가진 단층으로 되어 있고, 감상실 오른쪽 공간은 2층으로 나뉘어져 거기에 제2의 휴게실이 마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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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감상실 입장객은 이층 휴게실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이곳에서 차를 마시며 담소를 하거나 책을 읽을 수 있고 가져온 음식을 먹을 수도 있다. 방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온돌방도 하나 마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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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층 휴게실 앞 나무 데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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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층 휴게실을 나와 오른쪽으로 돌아서면 널빤지를 깐 널찍한 음악감상실 옥상이다. 테이블과 의자를 놓으면 꽤 많은 사람들이 어울릴 수 있는 모임도 가능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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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감상실 옥상에서 한 칸 더 올라가면 이층 휴게실 옥상이다. 이곳에도 테이블과 의자가 마련되어 있다. 이곳에 올라 맞은편의 산을 바라보며 담소를 나눌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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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아래쪽에서 본 ‘까르페 더 뮤직’.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고 할 수는 없다. 앞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가끔 차를 멈추고 호기심에 들렀다 가기도 하지만 주된 고객은 단골이다. 처음에 이곳을 알게 된 사람들이 하나둘 소개하여 가끔씩 찾아오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곳의 문을 연 지 4년 반이 지난 지금은 그 수도 꽤 된다. 고정 손님들의 입장료로 이곳 운영을 계속할 수 있을 정도는 된다. 입장료는 운영비로 다 들어가고 남는 금전적인 수익은 없다. 하지만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음악을 들으면서 누린 즐거운 시간이 바로 그들에게는 더할 수 없이 소중한 수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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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르페 더 뮤직’을 운영하는 사람은 두 사람이다. 박상호 님과 이삼란 님. 부부이다.

박상호 님이 음악감상실 음반실에서 음악을 틀고 있는 동안 이삼란 님은 휴게실에서 손님을 맞아 안내하는 일을 맡고 있다. 손님에게 대접할 커피나 차를 끓여 내놓고, 이 음악감상실과 관련하여 궁금한 일들을 묻는 손님들의 질문에 응대한다. 하지만 이제는 이곳을 찾는 손님들과 대부분 친구가 되었다. 오는 사람이 또 오기 때문에 자연히 낯이 익게 되고, 얘기를 나누다 보면 가까워지지 않을 수 없다.

단골 고객들을 동시에 초대하는 산중음악회도 가끔 연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까르페 더 뮤직’ 동호회가 만들어져 정기적인 모임을 갖는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만나니 음악 이야기가 중심이 되지만 음악 이야기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문학 이야기도 하고 미술 이야기도 한다. 이야기가 잘 통한다. 대부분 예술을 좋아하는 이들이다. 당연히 자연 속에 음악감상실을 차리게 된 박상호 님의 뜻과 취향을 얼마간씩 공유하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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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삼란 님에게, 박상호 님만큼 음악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젊었을 때부터 음악에 빠져 산 남편만큼은 아니지만 이제 음악을 깊이 좋아하게 되었다고 한다. 취향도 감염된다. 아니, 자신의 내면에도 음악을 향한 끌림이 이미 잠재해 있었을 것이다. 아니었다면 음악에 빠진 사람과 평생을 함께 사는 기회를 갖지 못하였을 것이다.

음악과 자연 속의 삶은 연관이 있는 것일까. 이들은 자연 속에 살면서 음악을 듣는다. 두 사람은 음악과 자연에 동시에 끌렸다. 그들이 자연에 끌린 이유와 음악에 끌린 이유는 서로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 음악은 자연이 품고 있는 조화와 리듬을 소리로 표현한 것인지도 모르니까.

박상호 님은 광고업계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는 10년 전 도시의 삶을 그만두고 산골에 들어가 살기로 마음먹었다. 이삼란 님도 기꺼이 동의했다. 오래 전부터 자연 속의 삶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가졌던 직업을 버리고 이곳 명달리를 찾아 자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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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르페 더 뮤직’에서 내려다본 부부의 살림집. 원래 이곳에 있던 낡은 토담집 네 채를 사서 지붕을 새로 얹고 내부를 개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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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는 이곳에서 거의 자급자족하는 삶을 살고 있다. 두 식구가 먹을 채소를 직접 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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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란에 있는 장독들. 두 사람 식생활을 위한 것치고는 장독들이 꽤 많다. 이들 식탁의 풍요로움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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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집 말고도 별채가 두 채 있다. 사랑채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한때는 얼마간의 소득을 위해 이 별채들을 게스트하우스처럼 운영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곧 접고 말았다. 게스트하우스 운영은 이들 부부에게 맞지 않는 일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까르페 더 뮤직’을 찾는 동호인이 원할 때 하룻밤 묵고 갈 수 있는 곳으로 이용하고 싶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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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채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예쁘다. 이웃집 개들이 자주 놀러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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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채 마루에서 내다 본 마당. 지금은 강아지들의 놀이터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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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속에서 음악과 사는 사람들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싶어 잠시 한 자리에 앉아 주기를 청했다. 박상호 님이 음반실을 나와 잠시 휴게실 테이블 앞에 앉았다. 두 사람이 잘 어울린다. 두 사람의 모습과 미소에 자연과 음악 속에서 사는 삶의 편안함과 부드러움이 배어 있다.

음반실을 한시도 떠날 수 없는 박상호 님을 보내 드리고 이삼란 님과 마주 앉았다. 몇 가지 상투적인 질문을 했다. 도시를 떠나 이곳에 사는 것에 만족하느냐고 물었다. 만족스럽단다. 점수로 환산한다면? 80점. 원래 이런 자연 속의 삶을 바랐었단다. 자연과 한적한 삶에 끌리는 DNA가 있었던 모양이다. 음악과 사는 삶은? 음악과만 사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소규모 농삿일도 해야 하고 주부로서의 일도 해야 한다. 남편은 음악감상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지만 자신은 살림집 생활과 휴게실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음악실을 찾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아니다. 하루에 다섯 사람에서 열 사람 정도? 아침 일찍부터 오는 손님은 없다. 그래서 자신은 아침이면 늘 1시간 반 동안 뒷산에 오른다.

이곳에서 살면서 특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대답을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까르페 더 뮤직’ 건물을 짓고 나서였다. 음악을 사랑해 전재산을 들여 이 큰 건물을 지었지만 누가 그 산골로 음악을 들으러 찾아오겠는가. 큰 기대를 걸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느 날 누군가 왔다. 그 첫 손님을 맞을 때의 감격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충격적인 경험도 있었다. 어느 날 몇 사람의 손님이 찾아와 음악을 들었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나가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남편이랑 이혼하세요.”라고. 그 사람은 그녀가 음악에 중독된 괴짜 남편을 위해 견디기 어려운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곳에서의 삶을 즐길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는 못한 사람이다.

짓궂은 질문도 해 보았다. 도시문화가 그리울 때가 없나요? 물론 있다. 가끔은 친구들을 만나 수다를 떨고 싶은 때가 있다. 하지만 친구들과 가끔 수다를 떨기 위해 더 큰 즐거움을 포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 부부가 일년 365일을 이곳에서만 지내는 것은 아니다. 일주일에 한 번, 주말에는 서울로 나간다. 토요일에 서울의 어머니 댁에서 하룻밤을 묵고 일요일에는 산행을 한다. ‘까르페 더 뮤직’이 일요일을 정기 휴일로 잡은 것은 그 때문이다. 이들 부부는 등산을 좋아한다. 등산도 명달리 산골 삶의 변주이자 연장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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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가진 삶의 철학과 취향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다. 저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다. 부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삶은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내 삶의 철학과 취향을 묻게 한다. 그것을 실천하며 살 수 있는 용기가 있는지 묻게 한다. 그 실천을 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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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속에 산다는 것은 많은 것을 뜻한다. 음악과 산다는 것도 그렇다. 자연 속에서 음악과 사는 삶도 그렇다. 그 가운데 한 가지 뜻은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우리의 원초적 삶의 터가 가진 색깔과 소리, 감촉과 움직임, 그리고 그것들이 가진 아름다움과 생명력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것을 직접 보고, 직접 듣고, 직접 접촉하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매개 없는, 자연과의 직접적인 만남과 교환을 원한다.

자연 풍경은 시각적 음악처럼 느껴진다. 자연 자체가 물질로 표현된 음악일지도 모른다. 음악가의 음악은 자연의 음악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형식일지도 모르고. . . 그렇다면 자연에서 음악과 사는 삶은 자연 음악을 날마다 몸으로 느끼면서 동시에 음반 음악을 통해 그것을 다시 추상화된 형식으로 되살려 음미하는 삶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음악감상실 이름이 ‘까르페 뮤직 Carpe Music’이 아니라 정관사가 붙은 ‘까르페 더 뮤직 Carpe the Music’이다. 그냥 음악을 붙잡아 음미하라는 것이 아니라 음악 자체, 음악의 본질을 붙잡아 음미하라는 뜻인 듯하다. (유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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