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을 중심으로 읽어 보는 세계문학: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For Whom the Bell Tolls)]는 미국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유명한 소설입니다.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스페인 내전은 1930년대에 새로 수립한 좌파 민주공화국 체제에 반발한 왕당파와 군부, 우익 보수 등 파시스트 세력의 반란이 확대되어 1936년에 시작된 내전입니다. 이 내전은 독일, 이탈리아 등 파시스트 국가의 지원을 받아 반공화국 세력을 이끈 프랑코 장군의 승리로 1937년에 끝납니다. 세계 여러 지식인과 함께 공화 정부를 지지했던 헤밍웨이는 취재를 위해 이 내전에 종군합니다.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써서 내전이 끝난 다음 해(1940년) 발표한 작품이 이 소설입니다.
3일간의 사건을 다룬 이야기의 간략한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미국의 젊은 대학강사 로버트 조던은 스페인의 자유 확립을 돕기 위해 공화정부군 편 게릴라 부대의 폭파병으로 참전합니다. 이 부대에서 그는 파시스트에게 아버지를 살해당하고 자신은 강간을 당한 가련한 여인 마리아를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조던과 마리아는 전략상 중요한 교량 폭파 임무를 맡고 작전을 완수하게 되는데 작전 중 조던은 크게 다치고 맙니다. 움직이지 못하게 된 조던은 마리아와 동료들을 살리기 위해 그들을 설득하여 떠나보내고 홀로 남아 죽음을 기다립니다.
이 소설은 1943년에 할리우드에서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게리 쿠퍼와 잉그리드 버그먼이 출연한 이 영화는 9개 부문에서 아카데미상 후보에 지명되었고 많은 관객을 끌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인기 있었던 영화입니다.
그런데 이 소설의 제목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무슨 뜻을 가진 말일까요? 이 제목은 물론 원제인 For Whom the Bell Tolls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입니다. 이 번역을 보면 이상합니다. 우리말로 되어 있지만 우리말에 없는 어법입니다. 이런 표현을 이곳 아닌 다른 곳에서 들어보았거나 읽었거나 사용해 본 기억이 없을 것입니다. 왜 우리말 어법에 없는 말이 사용되었을까요? 일본어 번역을 그대로 옮겼기 때문입니다. 일본어 제목 번역이 일본어 어법에 잘 맞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말 어법에 맞지 않는다는 것은 이곳 밖에서 그 사용 예를 찾을 수 없다는 데서 알 수 있습니다.
이 우리말 제목은 그 뜻을 짐작하기도 어렵습니다. 잘 된 번역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 축자역은 본래의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For Whom의 for를 무조건 ‘위하여’라고 번역하는 것은 중학생식 번역입니다. toll을 ‘종이 울리다’는 뜻으로 옮긴 것은 크게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지만, 그 뜻을 충분히 살렸다고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toll은 종 가운데에서도 특별한 종이 특별한 방식으로 울리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때의 종은 교회의 종입니다. 서양 교회에서는 이런저런 일을 신도들에게 알릴 때 종을 울리는데 경우마다 종을 울리는 방식이 다릅니다. 그 가운데 toll은 누군가의 죽음이나 장례식을 알릴 때 울리는 타종 방식입니다. 아주 느리게 4~5초의 간격을 두고 울려 슬픔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For Whom the Bell Tolls라는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자면 “저 종은 누구의 죽음을 알리는 것일까?”, 또는 “저 종은 누구의 장례를 알리는 것일까?”라는 말이 됩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라는 말이 주는 어감과는 거리가 먼 뜻입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라는 말에서는, 얼른 듣기에 로맨틱하고 목가적인 분위기가 연상될 것입니다.
영문학자들은 이 제목의 문제를 모르고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 오역은 여러 사람이 지적해 왔고 대안이 제시된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고쳐지지 않고 있는 것은 상업적인 이유가 클 것입니다. 대개는 출판사가 그 오역을 고집하는 수가 많습니다. 널리 알려진 예술작품의 제목은 나중에 문제가 발견되어도 그대로 유지되는 수가 많습니다. 일단 유통되고 있는 제목에 상업적인 프리미엄이 붙기 때문입니다. 가령 이 제목을 “누구의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인가”라고 고치면 독자들이 다른 소설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For Whom the Bell Tolls”라는 소설 제목은 헤밍웨이가 지은 것은 아닙니다. 영국의 17세기 형이상학파 시인 존 단(John Donne)이 쓴 기도문에서 따온 말입니다. 헤밍웨이는 소설을 시작하기 전에 단이 쓴 기도문의 일부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가 인용한 부분을 다시 우리말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은 아무도 그 자체로 온전한 섬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대륙의 한 조각, 본토의 일부이다. 흙 한 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가면, 유럽은 그만큼 줄어드니, 그건 곶이 씻겨 나가도 마찬가지이고, 그대의 친구나 그대의 영지(領地)가 씻겨 나가도 마찬가지이다. 누구의 죽음이든 그것은 나를 줄어들게 하는 것이니 그것은 내가 인류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저 종소리가 누구의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인가 알아보려고 사람을 보내지 마라. 그것은 그대의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이니.
이 대목은 흔히 존 단의 시 구절로 알려졌지만 시 구절이 아닙니다. 이 구절은 단이 병상에 있을 때 병과 고통과 건강을 주제로 쓴 기도문의 하나로 “묵상 meditations 17”이라는 제목이 붙은 글의 일부입니다. 존 단이 이 묵상에서 말하고 있는 뜻은 분명합니다. 우리 모든 인간의 삶은 하나로 묶여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홀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 개인은 섬처럼 육지에서 떨어져 독립된 채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헤밍웨이가 존 단의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작가는 이 소설 주인공의 행동과 선택을 통해 그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지식인 조던은 자기 나라와는 멀리 떨어진 곳의 싸움에 스스로 지원하여 싸우면서 목숨을 버립니다.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입니다. 조던 자신에게도 회의가 있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가 마리아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사랑이냐, 신념이냐를 놓고 갈등을 겪습니다. 그는 신념과 죽음 쪽을 선택합니다. 왜일까요? 남의 나라 전쟁과 타인의 죽음도 궁극적으로는 자기 삶의 일부임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헤밍웨이가 인용하고 있는 존 단의 묵상은 단순히 타인의 삶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인간의 운명 전체, 더 나아가 생명의 운명 전체의 관련성을 암시합니다. 우리는 한 포기 풀잎의 죽음이 풀잎만의 죽음만이 아닌 것을 압니다. 그 죽음은 우리 자신의 죽음을 예기해 줍니다. 오늘날 생태계 문제에 대한 반성도 For Whom the Bell Tolls의 깨달음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