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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d Max: Fury Road | Warner Bros.

[참고] 이 글에는 영화의 줄거리가 드러나 있습니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가 페미니즘 영화인가 아닌가를 두고 논란이 있는 듯합니다. 이 영화를 페미니즘 영화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이야기 줄거리가 여성들이 일으킨 사건을 중심으로 짜여 있고 사건을 이끌어가는 여성 주인공이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만족스럽게 그려져 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생각에 크게 반대하는 것은 아니면서도 이 영화를 특별히 ‘페미니즘 영화’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이 영화가 전례 없는 기획과 연출로 숨돌릴 여유를 주지 않는 ‘액션’으로 이루어진 것에 주목합니다.

한 편의 영화는 여러 관점에서 감상, 분석, 평가될 수 있습니다. 주제나 기법이 다층적인 요소를 가질 때는 한 영화가 동시에 여러 갈래로 분류될 수도 있고요. 다만 어떤 영화의 대표적 갈래의 이름은 그 영화의 가장 두드러진 주제와 기법, 또는 감독이 가장 마음에 두었던 요소, 또는 관객이 영화에서 느낀 가장 인상적인 특징을 고려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를 페미니즘 영화로 부를 수 있는지 하는 현재의 논란은 그와 관련되는 논란입니다. 이 논란이 정돈되지 않고 있는 것은 ‘페미니즘 영화’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개념 규정이 없이 시작되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페미니즘’ 영화와 ‘페미니스트를 만족시키는’ 영화

Rosie the Riveter
Rosie the Riveter

어떤 영화가 페미니즘 영화라고 불리기 위해서는 그 영화가 만들어진 목적이나 주된 주제가 페미니즘이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페미니즘’이라는 것은 양성평등에 대한 의식의 각성과 양성평등의 실현을 향한 노력이나 운동을 뜻합니다. 이 운동은 가부장적인, 혹은 남성 지배적인 사회의 구조와 그것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과 저항을 포함합니다. 그럼으로써 양성평등의 세계가 더 나은 세계임을 설득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양성평등이 실현된 삶의 본보기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어떤 영화가 페미니즘 영화임을 표방하려면 주된 액션이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합니다. 영화가 궁극적으로 겨냥하는 것은 페미니즘에 각성된 관객이겠지요. 이러한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페미니즘 영화라고 부르기에 적절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페미니즘을 주된 주제로 삼지 않아도 페미니스트들을 만족하게 하는 영화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인물들의 행동과 사고에서 양성평등에 대한 각성이 만족스러울 만큼 이루어져 있거나 양성평등이 실현된 영화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화의 초점이 다른 데에 맞추어져 있다면 페미니즘 영화라고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이를테면 [에일리언] 시리즈는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높이 평가할 수 있지만 페미니즘 영화라고 분류하기 어렵습니다. [그래비티]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페미니즘 영화라 부를 수는 없다 하더라도 페미니즘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영화로 기록될 수는 있습니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는 페미니즘 영화인가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는 페미니즘 영화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 이 영화는 ‘양성평등에 대한 의식의 각성’을 주된 목적으로 삼거나 ‘남성 지배적인 체제와 그것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과 저항’을 주된 소재로 삼고 있는 영화일까요? 그렇게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얼른 부정하기에 주저되는 대목들이 있습니다. 이 영화는 페미니스트들을 상당한 정도로 만족시키는 여성 주인공과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영화의 핵심적인 플롯이 폭력적인 남성 지배자로부터 탈출하려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고, 또 감독 자신이 이 영화에서 여성들을 어떻게 배치하고 어떻게 묘사할까 하는 문제를 고심했다고 하니까요.

여자 주인공 퓨리오사는 남자 주인공 맥스와 대등하게, 주체적이고 강인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맥스가 퓨리오스를 대하는 방식도 페미니스트들을 만족시킵니다. 맥스는 퓨리오스와 처음 대면했을 때 그녀를 여성이라고 얕보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에도 그녀와 다른 여성들을 성적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같은 인간, 같은 동료로 인식할 뿐입니다. 그녀와 다른 여성들에게 가르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결단도 퓨리오사의 몫입니다. 그들은 서로 돕고 상대방의 목숨을 구합니다. 퓨리오사도 맥스를 남성으로 대하지 않고 하나의 인간으로 대합니다. 두 사람 사이의 태도와 대화에서 성의 차이를 느낄 만한 대목이 거의 없습니다.

이 영화를 페미니즘 영화로 부르는 이들은 여성을 오직 출산 도구와 젖의 공급자로만 취급하는 임모탄의 시타델을 상징적 남성 지배 체제로, 그리고 그로부터 탈출하는 퓨리오사와 브리더들은 페미니스트적 각성을 한 여성들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남성에 의존하지 않는 부발리니 할머니들의 독립적 삶과 전투력에 주목합니다. 그들은 영화의 골격을 이루는 이 모든 것이 페미니즘의 주제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주장이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수 없습니다. 조지 밀러 감독이 페미니즘의 주제를 의식하면서 이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이 영화를 페미니즘 영화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이 영화가 페미니즘 영화로서 불리려면 페미니즘 영화가 갖추어야 할 요소들이 더 두드러져야 합니다. 이를테면 남성지배 체제에 억압받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지금보다는 더 많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거의 생략되어 있습니다. 본 이야기의 전사로서만 암시되어 있을 뿐입니다. 이 영화는 남성 지배 체제에 대한 저항의 과정보다는 탈출의 액션을 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암시되어 있는 여성에 대한 착취도 성 불평등이 아니라 폭력적인 통치 방식에서 비롯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시타델에서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남녀 모두가 폭력적 분업 구조 안에서 똑같이 착취당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퓨리오사가 남성 전사들을 지휘하는 사령관의 위치에 있는 것도 여성 일반이 반드시 차별받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암시해 줍니다. 퓨리오사의 탈출도 성의 불평등 구조로부터의 탈출이 아니라 비합리적인 중세적 폭력 체제로부터의 탈출이라는 성격이 더 강해 보입니다. 여성 해방이 그녀의 주된 동기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녀를 따르는 여성들은 임모탄을 견디지 못한 브리더들입니다. 하지만 탈출 과정에서 그녀들이 보여주는 태도와 행동을 페미니스트적 각성과 관련시키는 것은 지나친 해석일 수 있습니다. 그들의 필사적인 행동은 탈출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니까요.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표면적으로는 페미니스트들을 만족시키는 것 같으면서 은근히 남성 우월 의식을 심어주는 영화일 수 있다고 의심하는 관점도 있습니다. 여성 주인공을 멋지게 그리면서 결국은 남성 주인공을 더 뛰어나게 그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퓨리오사가 소금 사막을 건너지 않고 시타델로 돌아가게 한 것은 맥스의 조언이 아니었느냐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보는 것은 지나치다고 여겨집니다. 맥스와 퓨리오사는 모든 면에서 누가 더 우월하다고 하기 어렵게 대등했고, 맥스가 퓨리오사에게 통찰력 있는 조언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남성이 여성에게 했다기보다 경험 많은 한 개인이 다른 한 개인에게 한 조언이라 봐야 할 것입니다.

위험한 것은 여성이 모든 면에서 남성과 대등하게 그려져야 양성평등이 제대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는 관점입니다. 퓨리오사처럼 대부분 남성보다 뛰어난 여성이 그려질 수 있다면 페미니스트들의 자존감을 만족시킬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양성평등의 본질은 육체적 지적 기량의 평등과는 무관합니다. 양성평등은 양성 간에 생물학적 차이와 기량의 차이와 무관하게 개개인의 인간적 존엄이 존중되고 삶의 과정에서 차별 없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양성평등을 위해 퓨리오사가 반드시 맥스에 못지않게 강인해야 한다거나 부빌리니 할머니들이 반드시 뛰어난 액션을 보여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할머니들의 액션은 오히려 비현실적인 만화적 인상을 주어 페미니즘을 희화화시키는 효과를 내게 될지도 모릅니다.

페미니스트가 만든 액션 영화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는 페미니즘 영화라기보다는 페미니스트 감독이 만든 액션 영화라고 해야 더 적절하리라 봅니다. 이 영화를 페미니즘 영화라고 부르면 페미니즘 영화의 외연이 너무 넓어져 그 의미를 오히려 불투명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양성평등에 대한 각성보다 액션의 즐거움을 주는 것에 일차적인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물론 액션에 페미니즘적인 관점과 이야기가 입혀짐으로써 그 액션이 더 의미 있는 액션이 되었다고 볼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관객은 극장 문을 나서면서 양성평등 문제에 대한 각성보다는 주인공으로서의 퓨리오사의 멋진 모습과 숨 막힐 듯이 전개되었던 후련한 액션을 더 강렬하게 기억할 것입니다.

영화는 생태의 종말과 포스트 아포칼립스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지만, 그 주제는 강렬한 액션에 가려지고 말았습니다. 시간상으로 미래가 배경이면서도 분위기는 오히려 중세적입니다. 통치 이데올로기는 종교에 가깝고 통치자가 신처럼 숭배됩니다. 중세와 근대를 거치면서 쌓은 인류의 합리적 정신은, 전쟁 기계 제작 기술에만 그 흔적이 남아 있고, 나머지는 다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없습니다. 희귀 자원을 통제하고 뛰어난 전쟁 기계를 생산할 수 있는 과학과 기술력을 가진 사회가 중세적 맹신에 토대를 둔 비합리적 체제와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영화는 미래를 이야기하기보다 인류에 내재하여 있는 비합리성과 폭력에 대한 순응 경향을 이야기하기 위한 알레고리인 것일까요? 어찌 되었든 액션을 주목적으로 하다 보면 주제가 흐릿해지거나 이야기의 설득력이 약해지는 수가 많습니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는 폭압으로부터의 탈출과 저항이 혁명으로 귀결되는 모티프를 이용한 액션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액션이 두드러지는 만큼 정치적 메시지는 상대적으로 약해졌습니다. 퓨리오사에 의한 임모탄의 제거도 혁명이라기보다 우연히 이루어진 일종의 쿠데타라 할 수 있습니다. 시타델의 지배 집단과 민중은 임모탄의 주검을 보고서야 퓨리오사를 새 보스로 인정하게 됩니다. 다만 새 보스가 각성한 인물이기 때문에 그녀의 쿠데타는 체제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킬 가능성이 있습니다. 퓨리오사는 시타델을 민주적으로 그리고 성 평등적으로 통치하리라 기대됩니다. 이 영화는 중세적인 비합리적 공포 정치 체제가 한 여성과 한 남성, 그리고 그들이 이끈 동료들에 의해 종식되고 더 인간적인 세계가 수립될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이야기를 줄거리로 삼은 추격전 액션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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