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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능동에 있는 어린이대공원 꿈마루 건물 3층 북카페를 단골처럼 다닌다. 꿈마루 건물의 매력과 북카페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풍경의 아름다움 때문이다. 옛 골프장 클럽하우스를 리모델링한 이 건물은 콘크리트의 골조가 그대로 노출되어 약간 음산한 느낌을 주지만 묘한 향수와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건물 어디로나 이어지는 통로를 따라 이리저리 돌고나면 마치 작은 여행이라도 다녀온 듯한 뿌듯함이 느껴진다.

카페는 사방이 유리벽으로 되어있다. 남쪽 유리벽 밖으로 널찍한 베란다가 보이고 아래층 생태정원 건너 나무들 사이에 야외공연장의 흰 지붕이 보인다. 흰 지붕은 불시착한 우주선이 누워 있는 모습이다. 혹은 하늘을 우러르고 있는 와불의 얼굴 같기도 하다. 마치 중생제도하다가 그만 은퇴하고 먼 이국땅에 와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장면을 보고 있으면 비현실적인 공간에 와 있는 느낌이 든다. 여기에 바람이라도 불어 나무들이 흔들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는 묘한 설렘과 함께 기이한 상념에 빠져든다. 무시로 부는 바람은 나무들을 규칙적으로 혹은 불규칙적으로, 약하게 강하게 흔들어대며 꼭 외부에 어떤 신호를 전하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신호는 풀릴 듯 풀릴 듯 예감처럼 차오르다가 끝내 풀리지 않는다. 나는 속수무책으로 가슴만 두근거리며 이 광경을 바라만 볼 뿐이다. 카페에 오는 중요한 이유의 중의 하나가 이 신호를 풀수 있을까 싶어서다.

아마도 그날 그 시간에는 바람이 불지 않았었나 보다. 햇빛만 한적하게 비치고 나무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나 보다. 여느 때처럼 바깥 풍경을 내다보고 있었는데 문득 죽음에 대한 상념이 떠올랐다. 죽음은 어쩌면 바람이 그치는 것과 같은 현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퍼득 들었다. 죽음이 바람이 그치는 것과 같은 일상적인 현상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순간이나마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이 사라지고 어깨가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거르지 않고 건강진단을 해야 하고 매사에 조심조심 살아야 하는 모든 굴레에서 해방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이 그친, 불지 않는 장면이 아름다운 풍경의 하나인 것처럼 죽음도 그 자체로 아름다운 한 장면이 아닌가.

문득 그동안 궁금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친 바람은 지난날 바람이 나에게 보냈던 신호를 다시 생각해 보게 했다. 바람은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주었다. 삶의 여러 기로에서 나는 바람 앞에 서서 새로운 삶의 의지를 다진 적이 있다. 바람이 나에게 삶의 의욕을 불러 일으켰는지, 아니면 고무된 삶의 순간이 자연의 움직임을 새롭게 느끼게 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여튼 바람은 쓰러지려는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 주었고, 나를 다시 움직이게 해 주었다. 그런데 바람 앞에 섰을 때 과연 나는 단순한 삶의 욕구를 느낀 것을 넘어서 제대로 된 삶의 방향까지 깨달았던 것일까. 혹 바람의 신호를 놓쳤던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나는 바람이 감추고 있는 세계를 보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들에서 바람 안에 감추어진 세계들을 본 것 같다. 센과 치이로의 행방불명에서 센이 수상한 터널을 지나 만났던 세상. 반 고흐의 그림에서도 그런 세상을 보았다. 센이 터널을 지나 감추어진 세상을 보았듯, 반 고흐도 빛이 감추었던 또 다른 세상을 보았다. 고흐의 그림들을 미디어 아트로 재현한 한 전시장에서 캔버스에 갇혀 있던 세상이 꿈틀대며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바람이 보내는 신호의 의미를 이제 조금 짐작할 듯하다. 이제 바람 어딘가에 있을 수상한 터널을 찾아나서야 할 것 같다. 꿈마루 북카페에서 그 터널을 찾게 될지 아니면 바람 부는 다른 장소에서 우연히 그것을 찾게 될지 모르지만 나는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살 것 같다. 다만 어린 센이나 고흐 같은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없어 쉽지 않겠지만 바람 속의 세상에 대한 궁금증은 오래도록 남을 것 같다. (송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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