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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프라하의 봄 (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

 

제목을 중심으로 읽어 보는 세계문학: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L’Insoutenable légèreté de l’être)](1984)은 체코 작가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의 소설입니다. 체코어로 먼저 쓰였지만 프랑스어로 먼저 출간된 작품으로 20세기에 나온 가장 중요한 작품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무엇보다 제목이 인상적이어서 이 소설을 읽지 않은 사람들도 이 제목만은 잘 기억하고 즐겨 인용합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이 소설의 주인공 토마시가 가진 존재와 삶에 대한 통찰을 표현한 말입니다. 그런데 책을 읽지 않고서는 이 책의 제목만으로 토마시가 얻은 그 깨달음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제목에는 이중의 뜻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중의 뜻이 우리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 것은 그 말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번역은 원문의 표현을 100 프로 다 옮기기 어렵습니다.

존재의 가벼움: 한 번뿐인 순간, 그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토마시는 젊은 외과 의사입니다. 그는 여성을 좋아하지만 사랑에 빠지는 법이 없습니다. 세속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는 여성 편력을 일삼는 바람둥이입니다. 그가 여성을 좋아하는 이유는 모든 여성이 서로 다르고 여성과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서로 다른 삶의 순간을 경험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삶의 어떤 순간이 되풀이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삶의 모든 경로는 일회적이며 어떤 다른 경로로 대치되거나 복제되지 않고 영원히 사라져 버립니다. 그런 의미에서 존재의 순간은 한없이 가볍습니다. 흘러가 버리는 순간순간이 감당할 수 없이 가볍습니다. 그는 그 모든 순간을 음미하고자 합니다. 토마시가 보기에 존재와 삶을 관통하는 필연이나 궁극적인 의미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의미를 주장하는 어떤 행위도 그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한 여성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우연이 축적되는 결과일 뿐입니다. 그런 그가 한 여성의 사랑을 자기도 모르게 받아들이고 맙니다.

한국영상자료원 kmdb.or.kr
한국영상자료원 kmdb.or.kr

토마시와 사랑에 빠진 테레자는 그가 자기를 사랑하면서도 여성 편력을 그치지 않는 것을 괴로워합니다. 그것이 그의 철학에서 나오는 것임을 이해하려고 애쓰면서도 힘이 듭니다. 하지만 그녀는 상처와 고통을 견디면서 자신의 사랑을 필연이라 생각하고 끝까지 토마시를 버리지 않습니다. 그녀는 삶을 무겁게 받아들이며 사는 사람입니다.

토마시의 깨달음을 공유하고 그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은 그의 연인이자 친구인 화가 사비나입니다. 사비나는 의미 부재의 깨달음에 바탕을 둔 자유의 철학을 더 철저히 실천하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녀는 어떤 이념에도 매이려 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자유 영혼은 구속을 거부하는 배신의 행위를 긍정합니다. 그녀는 자신을 헌신적으로 사랑하는 대학교수 프란츠와 한동안 가까이 지냅니다. 하지만 진보와 혁명적 이념을 삶의 중요한 가치로 삼는 그의 이상주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를 버리고 떠납니다. 사비나는 이념성을 가진 모든 예술을 키치이자 프로파간다라고 봅니다.

이념의 무거움: 되풀이되는 삶의 역사는 없다

이 소설은 주로 두 쌍의 남녀가 맺는 관계가 이야기의 중심이 되어 있지만, 그 배경도 중요합니다. 주된 배경은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의 체코입니다. 이른바 ‘프라하의 봄’을 거쳐 다시 소련의 침공으로 시작된 사회주의 체제의 체코가 이야기의 뒤에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정치적 상황을 배경으로 두고 보면 이들 남녀 관계의 성격과 의미가 더 이해할 만하게 드러납니다. 존재와 삶의 역사를 무겁게 보는 철학에 대한 토마시의 거부감은 당대의 억압적 정치 체제와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토마시는 오이디푸스를 인용하여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논평하는 한 편의 글을 우연히 신문에 싣게 됩니다. 그 글로 인하여 그는 반체제 저항 세력으로부터는 동조자로 인식되고 체제 쪽으로부터는 주의할 인물로서 감시의 대상이 됩니다. 그는 그의 글을 실은 편집자를 찾아내려는 당국의 회유와 요구를 거부함으로써 의사직을 잃게 됩니다. 그는 체제의 징벌로 주어진 유리창을 닦는 청소 노동자의 일자리를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그는 반체제 운동권의 정치적 선언문에 서명하는 일 역시 거부합니다. 그가 보기에 체제의 이념이나 그것에 저항하는 이념은 모두 삶과 역사에 무거운 허위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토마시는 결국 테레자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녀와 함께 억압적 체제가 지배하는 도시를 떠나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삶을 선택합니다.

작가는 사람이 하나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고, 하나의 결정밖에 할 수 없다면, 그리하여 다른 길을 택하기 위해 되돌아갈 수 없다면, 두 가지 삶을 비교할 수 없고, 비교할 수 없다면 의미란 존재할 수 없다고 봅니다. 따라서 궁극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없는 존재의 상황에서 삶의 인식과 실천에 특정한 방향과 의미를 부여하려는 이념이나 정치철학을 받아들이기가 힘듭니다. 이러한 거부감은 토마시의 경우처럼 작가가 직접 경험한 공산사회주의 체제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벼움의 철학만으로 삶이 지탱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일말의 의문과 갈등도 없지 않아 보입니다. 결국 테레자의 사랑에 의지하게 되는 토마시의 마음, 토마시에 대한 테레자의 사랑에도 작가는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존재의 가벼움은 “참을 수 없는” 것일까?

img.unbearable.02이 소설의 원래 제목은 중의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말로 번역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참을 수 없다’는 말 때문에 ‘존재의 가벼움’이 부정적으로 여겨지게 되는 효과가 있습니다. 가벼움이라는 말이 경박성만을 나타내는 부정적인 표현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에게는 가벼움의 철학적 실천이 경박하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토마시가 통찰한 존재의 가벼움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무거운 가벼움일 수 있습니다. 단 한 차례의 경험으로 사라져버리는 삶의 순간처럼 무겁게 여겨지는 것은 없을 테니까요. 우리말로 ‘참을 수 없는’이라고 번역된 프랑스어 insoutenable이나 영어의 unbearable은 원래는 모두 ‘무거워서 감당할 수 없는’ 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소설의 제목이 가지는 일차적인 뜻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무겁게 여겨지는 존재의 진실로서의 가벼움‘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모순형용의 제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겁고도 무거운 존재의 가벼움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살아야 한다면 어떤 삶의 방식을 선택해야 하는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소설은 1988년에 같은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졌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프라하의 봄”이라는 번안 제목으로 개봉되었고요. 영화를 본 쿤데라는 영화가 소설의 정신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면서 다시는 자기 작품을 영화로 만들지 않겠다고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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