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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이 글은 인페르노 특집 시리즈의 일부입니다. topa.co.kr/inferno
[유의] 이 글에는 소설의 중요 내용과 결말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인페르노]의 서두에는 작가가 이 소설의 주제를 암시하는 듯한 문장이 하나 인용되어 있다. “지옥의 가장 암울한 자리는 도덕적 위기의 순간에 중립을 지킨 자들을 위해 예비되어 있다(The darkest places in hell are reserved for those who maintain their neutrality in times of moral crisis.)”는 말이 그것이다. 이 말은 조브리스트가 엘리자베스 신스키에게 보낸 쪽지에 적혀 있는 말이기도 하다. 신스키는 이 말을 보고 그것이 단테의 작품에서 나온 인용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은 소설의 액션이 진행되는 동안 신스키와 랭던의 상념에 계속 떠오른다. 그런데 [신곡]의 한 구절인 것처럼 인용되어 있는 이 말은 사실 [신곡]의 구절은 아니다. 미국의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이 이와 비슷한 표현을 단테의 말로 착각하고 잘못 인용했는데 댄 브라운이 그걸 한 단어만 바꾸어 이용한 것이다. [신곡]의 한 부분에서 비슷한 내용이 언급된 대목이 있기는 하지만 단테가 지옥의 가장 어두운 곳에서 본 영혼들은 도덕적 위기에 중립을 지킨 자들의 영혼이 아니고 이런저런 배신자들의 영혼이었다. 단테의 작품을 정독했을 댄 브라운이 이를 몰랐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그가 이 말을 단테의 말인 것처럼 사용한 것은 자기 작품의 윤리적 주제를 선명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다시 말해 이는 인류 멸망의 지옥의 같은 상황을 단테의 인페르노 이미지와 연결시키면서 독자에게 조브리스트 행동의 윤리적 정당성을 암시하기 위한 수법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작가는 독자에게 이 인용구가 말하고 있는 바를 고민해 보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 같다. 요구를 받은 우리 독자로서는 그 문제를 고민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 우리에게 주장하고 있는 바에 대해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 것일까? 그의 말을 못 들은 척하지 않고 어떤 행동을 해야 한다면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 것일까?

[참고]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이 한 연설에서 단테의 말이라면서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은 도덕적 위기의 시대에 중립을 지킨 사람들을 위해 남겨져 있다(The hottest places in hell are reserved for those who maintain their neutrality in times of moral crisis.)”고 잘못 인용하고 있다.

위기 상황의 성격

[인페르노]에서 조브리스트가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 가면서까지 경고하고 있는 인류의 위기 상황은 다른 대중 소설과 영화들이 보여주는 위기 상황과는 조금 다르다. 외계인의 침공이나, 슈퍼악당의 핵폭탄 위협 같은 허구의 위기가 아니다. 조브리스트가 경고하는 위기 상황은 현실성이 높은 실제의 위기 상황이다. 그것은 소설 속 인물의 허구적 주장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많은 환경/생태학자들이 실제로 경고하고 있는 위기인 것이다. 소설 속에서 조브리스트는 좀 더 극적인 방법으로 그 위기를 환기시키고 있을 뿐이다. 그는 과학적 사실과 통계에 근거하여 세계의 인구가 지구가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이미 두 배 이상 초과했다고 본다. 그리고 현재의 인구 증가 속도로 볼 때 인류는 1세기 안에 자원 고갈로 인한 치열한 생존경쟁과 그로 인한 도덕적 타락으로 지옥과 같은 상황 속에서 멸망하고 말 것이라고 판단한다. 인류는 1세기라는 시간을 남겨 놓고 있지만 그는 지금 당장 극적인 조처를 취하지 않으면 파멸을 피할 수 없다고 본다. 그는 바로 지금을 행동을 해야 하는 위기의 시기라고 보는 것이다.

조브리스트는 인류의 멸망을 눈앞에 두고 있으면서도 매우 소극적으로 대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세계보건기구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는 저명한 과학자의 자격으로 세계보건기구의 사무총장 엘리자베스 신스키 박사에게 인류를 구하기 위해 자기와 공동 연구를 하자고 제안한다.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현재의 인구를 1/3로 줄이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은 신스키 박사에게 인구의 1/3을 “죽이자”는 말과 다름없이 들린다. 그리고 조브리스트가 질병을 치료해서는 안 되고 질병을 만들어 내야 한다고 주장하자 그 의도의 정체를 확신한다. 신스키 박사는 그가 미쳤다고 생각한다. 독자의 생각도 아마 신스키 박사의 생각과 같을 것이다. 인구를 줄이기 위해 질병을 퍼뜨려 사람들을 죽게 하는 것은 시리아에서 그랬던 것처럼 화학가스를 뿌려 살인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떠한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끔찍한 범죄 행위가 아닐 수 없다고 여겨진다. 신스키 박사가 그를 잠재적인 범죄자로 단정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독자는 조브리스트의 생각을 무작정 비난하기에는 무언가 꺼림칙한 게 남아 있음을 동시에 느낀다. 궤변처럼 들리는 조브리스트의 주장에 부정하기 어려운 수학적 근거가 있어 보이고, 인류 구원이라는 목적의 동기가 선한 동기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대안을 내 놓아보아라, 는 조브리스트의 요구에 대해서도 독자는 세계보건기구의 수장처럼 대꾸할 말이 없다. 독자는 혼란스러운 갈등에 빠지게 된다. 조브리스트는 어느 대목에서 “썩은 다리는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잘라내야 한다. 때로 유일한 행동은 덜 나쁜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전형적인 윤리적 딜레마의 상황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비유로 제시되고 있는 이 딜레마의 상황에 대해서 우리의 직관은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질병을 일부러 퍼뜨려 인류의 1/3을 죽이는 것은, 그것이 설사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일이라 하더라도,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유사해 보이는 두 가지 상황에 대해 왜 우리의 도덕적 직관은 상반되는 판단을 내리는 것일까?

구명보트 윤리

[인페르노]의 이야기가 제시하는 윤리적 딜레마의 상황은 우리에게 낯선 것이 아니다. 우리 주변에 늘 있어 왔던 문제이다. 그러면서 아직 모든 이를 설득력할 만한 답이 나와 있지 않은, 그런 문제이다.

1) 상황 X

조브리스트가 인식하는 인류 위기의 상황은 널리 알려진 구명보트의 상황과 비슷하다. 배가 폭풍을 만나 침몰하였다. 다행히 구명보트가 하나 있는데 보트에 올라탄 사람의 수가 보트의 수용 능력보다 많다. 수용 능력은 6명인데 보트에 탄 사람이 9명인 것이다. 9명이 모두 타고 있으면 보트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뒤집히거나 가라앉아 모두가 죽게 된다. 6명이라도 살 수 있으려면 3명이 내려야 한다. 3명의 사람을 희생시킬 수 있는가? 희생시켜야만 한다면 그 3명의 사람을 어떻게 선택해야 하는가?

2) 상황 A

우리는 상황 X에 이르기 전의 상황 A를 상상할 수 있다. 이 상황에서는 수용 인원이 6명인 구명보트에 5명이 승선해 있는데 보트에 타지 못하고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구조를 원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한 명을 더 태울 수 있다. 그러나 생존 안전율을 고려한다면 한 명을 더 태우는 일도 위험하다. 더 나아가 보트에 기어오르려 하는 수많은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상황 A는 생태학자 개릿 하딘(Garrett Hardin)이 오늘의 세계가 직면한 경제적 생태적 위기의 성격을 논의하면서 비유적으로 제시한 상황이다. 하딘은 인류가 공멸을 면하려면 물 속의 조난자에게 구조의 손을 내밀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그는 “공유지의 비극(The tragedy of the commons)”을 예로 들어 그러한 판단의 불가피성을 “구명보트 윤리(lifeboat ethics)”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공유지의 비극이란 모든 가축 사육자에게 목초지를 개방하면 빠르게 황폐화하여 가축들이 모두 굶어 죽고 만다는 이론이다. 구명보트에 탄 사람들이 인도주의 윤리관으로 물속에서 구조를 요청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게 되면 보트가 침몰하여 모두가 죽게 되듯 부국이 자신의 자원을 빈국에 나눠주다 보면 지구의 자원이 빠르게 고갈되어 부국과 빈국이 공멸하고 만다는 것이다. [인페르노]에서 조브리스트를 대변하는 시에너도 “공유지의 비극”과 유사한 비유를 들어 인구 증가가 초래할 인류 멸망의 위기를 설명한다. 작은 못에 사는 조류(藻類)는 영양분의 균형을 누리는 상태에서 억제되어야 하는데 번식을 방치하면 조류가 못의 수면을 가득 채우고 되고, 수면을 가득 채운 조류가 서로에게 햇빛을 가림으로써 성장을 막아 결국은 다 죽게 된다는 것이다(제50장).

[참고] Garret Hardin, “Lifeboat Ethics: the Case Against Helping the Poor.”

3) 상황 A에서 상황 X+로

조브리스트가 보기에 지구상의 인류는 이미 상황 A를 넘어섰을 뿐만 아니라 상황 X를 넘어서 빠른 속도로 상황 X+로 치닫고 있다. 인류가 인구 증가를 통제하지 못해 6인승의 구명보트에 이미 9명이 탄 상태가 되고 말았으며 다른 조난자들이 계속해서 보트에 올라타려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조브리스트가 생각할 수 있는 해결 방법은 하나뿐이다. 인류가 공멸하지 않으려면 지구의 수용 능력만큼 인구를 줄일 수밖에 없다. 하딘의 “구명보트의 윤리”를 수정하여 적용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제 이미 배에 올라 탄 9명의 사람 가운데 3명을 어떻게 선택해서 어떻게 배에서 내리게 하여야 하며, 배에 올라타려고 하는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막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누가 선택의 결정권을 갖는가? 실제로 이런 상황에 처한 사례들이 있었고 그와 관련하여 많은 윤리 논쟁이 있었다. 신스키 박사와 랭던 교수는 조브리스트가 대상을 무작위로 선택하여 강제로라도 배에서 내리게 하는 방법을 실천하려 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그 방법을 허용할 수 없다고 보고 그걸 막으려 한다. 이 소설의 액션은 그런 가정 하에 이루어진다.

정의란 무엇인가?

우리나라에서 널리 읽히고 있는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의 [정의란 무엇인가(Justice)]도 유사한 도덕적 딜레마를 논의하고 있다. 브레이크가 고장나 무섭게 질주하고 있는 기차 앞 선로에 다섯 사람의 인부가 작업을 하고 있다. 그 옆에 비상철로가 있고 거기에는 한 사람의 인부가 작업을 하고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다섯 사람을 살리기 위해 노선을 바꿔 한 사람을 죽여야 하는가? 문제를 선명히 하기 위해 이 상황은 약간 변형되어 다시 제시된다. 비상철로가 없고 대신 다리 위에서 이 상황을 구경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을 밀어 철로에 밀어 떨어뜨리면 기차를 멈출 수 있다. 당신은 5명의 사람을 살리기 위해 그 사람을 밀어 떨어뜨리겠는가? 혹 다른 사람이 당신을 밀어 떨어뜨려 5명의 사람을 구하려고 한다면 당신은 찬성하겠는가? 샌델 교수는 문제만 제기할 뿐 뚜렷한 답변을 내놓지 않는다. 비슷한 상황이지만 우리의 직관은 경우에 따라 다른 판단을 내릴 것이다. 하지만 모두의 공감과 동의를 얻어낼 수 있는 답변을 제시하기는 쉽지 않다. 이런 딜레마의 상황에 대한 답변은 크게 도덕적 의무론자와 결과론자의 것으로 갈린다. 그래서 의도적인 살해는 어떤 경우든 나쁘다는 의무론자의 생각과 더 많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는 살인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결과론자의 생각이 대립한다. 신스키와 조브리스트의 갈등도 단순화시키면 의무론자와 결과론자의 갈등이라고 볼 수 있다.

[참고]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공리주의: 경제학자의 황금률

조브리스트의 판단은 공리주의 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 전체를 위해서라면 불가피하게 소수가 희생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공리주의 철학을 간단히 설명하는 널리 알려진 말은 제레미 밴덤(Jeremy Bentham)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다. 선택을 요구하는 문제 상황에서 상황을 극복하는 방법이 부정적인 것들밖에 없을 때, 공리주의 원리는 전체의 이익에 손해를 덜 끼치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다. 조브리스트가 “썩은 다리는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잘라내야 한다. 때로 유일한 행동은 덜 나쁜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라고 말할 때 그는 전형적인 공리주의 원리를 말하고 있다.

공리주의는 많은 비판을 받으면서도 여러 곳에 살아 있다. 알고 보면 자신도 모르게 공리주의 원리를 받아들이며 사는 사람들이 많다. 전체, 혹은 다수의 이익을 위해 희생당해야 할 사람이 설마 자기이겠는가,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물론 다수를 위해 희생해야 할 사람이 자기로서 지목될 경우 – 가령 구명보트에서 내려야 할 사람이 자기라고 지목될 때 –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원리가 비윤리적이라고 거부할 것이다. 하지만 희생자가 다른 사람일 경우는 대부분 그 결정이 옳다고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스티븐 랜즈버그(Steven Landsburg)라는 경제학자는 서슴없는 공리주의 찬성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경제학자 철학에 답하다(The Big Questions)]라는 책에서 10억명의 두통을 없앨 수 있다면 두통 환자 1명을 무작위로 선택해 죽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선택은 우리의 윤리적 직관을 거스를지 모르지만 경험으로 보면 누구나 살아가면서 그런 식의 살인에 동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자동차를 운전하면 그 행위 때문에 누군가 분명히 죽을 수 있는데 그걸 알면서도 모두들 운전을 한다. 랜즈버그는 경제학자답게 “비용보다 편익이 크다면 생산적인 행위”라고 말하고 그것을 경험으로 터득한 “경제학자의 황금률(Economist’s Golden Rule)”이라고 부른다. 옳고 그름이 헷갈릴 때는 그 기준으로 판단하라고 권한다.

[참고] 스티븐 랜즈버그, [경제학자 철학에 답하다].

공리주의: 장기 이식의 사례와 잠수함의 사례

문제는 공리주의 원리의 적용이 어떤 상황에서는 옳지 않은 행위로 판단되고 어떤 상황에서는 옳은 행위라고 판단된다는 점이다. 스티븐 로(Stephen Law)는 그의 [철학학교(The Philosiphy Gym)]에서 우리의 직관이 거부하는 비윤리적 공리주의와 우리의 직관이 승인하는 윤리적 공리주의의 대표적인 예를 들고 있다.

죽음을 앞둔 말기암 환자와 심장병 환자가 있다. 심장병 환자도 심장을 이식하지 않으면 곧 죽게 된다. 이때 말기암 환자의 심장을 심장병 환자에게 이식하면 심장병 환자를 살릴 수 있다. 대신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으면 두 사람 모두 죽게 된다. 당신이 의사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공리주의의 관점을 따르면 암 환자를 죽이고 심장병 환자를 살리는 것이 올바른 결정이다. 암 환자는 어차피 죽을 사람이고 한 사람이라도 살리는 것이 두 사람이 다 죽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직관은 이러한 결정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내가 암 환자라고 생각해 보면 안다. 다른 생명을 살릴 수 있다 해도, 내 생명을 허락 없이 뺏는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어떤 의사도 암 환자를 죽이고 심장병 환자를 살리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암 환자가 설사 그것을 동의한다 하더라도 오늘의 법과 도덕은 그것을 범죄로 판단할 것이다.

다른 경우는 이렇다. 북태평양의 한 미국 핵잠수함이 기계설비의 오작동으로 핵폭탄을 발사하게 될 위기에 처했다고 해 보자. 당신은 그 보고를 받은 미국대통령이다. 어떻게 하겠는가? 핵폭탄이 발사되면 수백만의 사람들이 죽게 된다. 이 재앙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미사일을 발사해서 잠수함을 파괴하는 것뿐이다. 잠수함에 탑승한 무고한 승무원들이 다 죽는다 해도 이 경우는, 슬프지만 우리의 직관은 잠수함을 파괴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비난받을 일은 아니라고 판단한다. (조브리스트는 잠수함의 사례와 비슷한 논리를 이용한다. 하지만 그의 논리는 상황의 급박성의 면에서 잠수함의 상황과는 다르다. 인류 멸망의 예상은 1세기 뒤의 일이기 때문이다.)

공리주의 원리는 이처럼 모든 상황에 일률적으로, 기계적으로 적용되기 힘들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공리주의의 비윤리성을 문학적으로 보여준 예가 있다. 마이클 샌델 교수도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언급한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The Ones Who Walk Away from Omelas)”이라는 단편소설이 그것이다. 허구적 상황을 다루고 있지만 문제의 핵심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 단편소설은 어떤 이상적인 도시를 그리고 있다. 이 도시에서는 모든 것이 풍족하고, 모든 것이 만족스럽다. 모든 시민이 행복하게 산다. 그런데 이 도시에는 비밀이 있다. 한 소년이 어느 어두운 지하 감옥에 갇혀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 도시의 모든 행복은 사실 이 소년이 감옥에 갇혀 고통스럽게 살고 있는 덕분이다. 사람들은 모두 그걸 알고 있지만 모른 체한다. 이 소년을 해방시켜 주면 그 순간 그들의 모든 풍요와 행복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행복은 정당하고 올바른 행복일까.

한 사회가 윤리적으로 좋은 사회이냐 아니냐, 를 알려면 그 사회의 가장 불행한 사람이 어떻게 사느냐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100사람이 부자로 행복하게 잘 산다 하더라도 한 사람이 불행하게 살고 있다면 그 사회는 좋은 사회라고 할 수 없다. 그 사회의 부와 행복은 그 사람의 부와 행복을 빼앗아 이루어진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수의 편익과 행복의 관점에서만 생각하는 공리주의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비윤리성을 내포하고 있을 수 있다.

[참고] Ursula Le Guin, “The Ones Who Walk Away From Omelas.”

아름다운 공리적 행위로서의 자발적 희생

그러나 아름다운 공리적 행동의 순간들도 있다. 다른 존재를 위한 자발적인 희생 행위가 그렇다. 이타적 희생이다. 물론 모든 이타적 희생을 다 공리적 동기를 가진 행위라고는 할 수 없다. 이를테면 어머니가 자동차에 치려는 자식을 구하고 죽는 행위가 그렇다. 한 사람을 살린 대신 한 사람이 죽었기 때문이다. 그런 희생 행위가 사회에 미치는 정신적 영향이 결국 공리적 효과를 낸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밧줄 위에 매달린 동료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밧줄을 끊는 산악인의 경우는 단순한 계산으로 봐도 분명히 공리적이다. 왜냐하면 그러지 않았을 경우 두 사람이 모두 죽기 때문이다. [그래비티]라는 영화에서 조지 클루니가 생명선을 끊어 샌드라 블록을 살리는 경우도 그렇다. 그가 줄을 끊지 않았더라면 두 사람은 모두 죽었을 것이다. 한 사람의 희생이 여러 사람을 구하는 경우도 있다. 고문을 당하며 죽어가면서도 끝까지 동료의 주소를 밝히지 않는 레지스탕스 대원, 부하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수류탄 위에 몸을 덮치는 장교의 경우가 그렇다. 이처럼 자발적으로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죽는 사람의 수를 줄이거나 다수의 생명을 살리는 일은 아름다운 공리적 행위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구명보트의 상황에서도 그렇다. 수용인원을 초과한 보트에서 일어날 수 있는 아름다운 윤리적 행위는 6명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3명의 사람이 누구의 강요도 받지 않고 스스로 보트에서 내리는 것이다.

[인페르노]에서 조브리스트 역시 인류를 구하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자발적 희생(benevolent suicide)이 필요하다고 본 것 같다. 시에너에 따르면 그는 “Who Needs Agathusia?(누가 아름다운 자살을 해야 하는가?)”라는 글에서 그런 요구를 암시하고 있다(제50장). 하지만 그것은 인류를 구하기 위해 20억의 지구인이 아름다운 자살을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과잉 인구로 인한 인류의 위기는 인류를 죄의 구덩이에서 구원한 예수의 희생이나 자식들을 위해 목숨을 던진 세일즈맨 윌리 로만(Willy Loman)의 희생과 같은 방식으로 구원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조브리스트가 생각한 희생이란 인구 증가에 책임이 있다고 여겨지는 전통적 의료와 의료 제도의 자기 혁신적 실천 같은 것을 뜻했던 것 같다. 구체적으로 그는 신스키 박사에게 세계보건기구가 지금까지 시행해 오던 소극적 인구 억제 방식을 포기하고 진정으로 실효가 있는 특단의 대책을 세우기를 요구한다. 하지만 신스키 박사는 그가 암시하는 방법이 생물학적 테러일 수밖에 없다고 단정한다. 그래서 그의 무모한 범죄적 행동을 필사적으로 막으려 한다. 독자는 소설의 말미에서 조브리스트가 자신을 인류를 위해 ” 아름다운 자발적 희생”을 하는 사람으로 자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바디아 교회의 첨탑에서 뛰어내릴 때 자신의 목숨을 버림으로써 인류를 구원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의 생각과는 별개로 우리가 그의 행위를 과연 아름다운 자발적 희생으로 인정해 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물음으로 남는다.

[참고] 윌리 로만은 아서 밀러(Arthur Miller)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The Death of a Salesman)]에 나오는 인물.

왜 조브리스트의 방식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울까

조브리스트는 질병을 이용하여 지구의 인구를 1/3로 줄이면 인류를 살려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전형적인 공리주의적 주장이다. 왜 이 주장은 랭던의 말처럼, “생각하기 어려운(unthinkable)” 터무니 없는 말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논리적으로는 부정하기 힘든 말이 아닌가? 하지만 그것이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라고 느껴지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런 이유들이 아닐까.

(1) 그 방법밖에 없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조브리스트의 판단이 100% 옳다고 확신할 수도 없다. 조브리스트는 인구를 줄이지 않을 경우 100년 안에 자원 부족으로 인류가 멸망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인구 증가 속도가 늦춰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 여러 나라에서의 출산율 저하 현상을 보면 그런 기대가 가능하다. 위기가 더 늦춰질 수 있는 것이다. 또 100년 안에 인류가 자원 부족을 해결하는 기술적 대안을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가능하다. 맬더스가 식량이 산술급수적으로 느는 데 비해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위기에 닥친다고 예언했지만 그의 예언을 정확하지 못했다. 그 사이 인류는 식량 증산을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는 농업기술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현재의 인류가 자원 부족을 걱정하고 있지만 새로운 에너지 자원에 대한 기대도 있다. 우주 자원의 이용이나 우주 이민의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인류의 기술발전은 새로운 돌파구를 발견하리라고 믿을 수도 있는 것이다.

(2) 자연적인 질병이 아니고 인위적인 질병으로 인구를 줄이는 것은 살인과 다를 바 없다. 인구의 1/3을 죽게 만들었던 흑사병은 자연의 재난이었다. 자연의 재난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만 죄 없는 사람들을 1/3이나 무작위로 죽이는 일은 받아들일 수 없는 범죄이다. 인간은 타인과 공동체에 해를 입히지 않는 한, 사람의 생명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누구나 받아들이는 도덕과 법을 확립한 윤리적인 존재이다. 인위적인 질병으로 인명을 죽여 인류의 삶이 지속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연장되는 삶은 인간의 윤리와 존엄성에 어긋나는 삶이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10억명의 두통을 없앨 수 있다면 1명의 두통 환자를 얼마든지 무작위로 죽이겠다는 랜즈버그 교수도 경제학자의 황금률을 내세워 인류의 1/3을 무작위로 죽이는 데에는 쉽사리 찬성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조브리스트의 팬이 아니라면.)

(3) 질병에 의해 죽어야 할 인구가 1/3이라면 나 자신이 거기에 포함될 가능성이 1/3이 된다. 내가 죽어 버린다면 인류의 구원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누구든 죽음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기대된 수명을 다 하지 못하고 인위적인 질병의 희생물이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심장병 환자를 살리기 위해 암환자를 죽여 심장을 이식할 수는 없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후손이 존속하기 바란다. 인류도 멸망하지 않으면 좋다. 그러나 후손의 존속과 인류의 멸망을 막기 위해서 자신의 기대 수명을 포기하고 앞당겨 죽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후손의 존속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자식을 구하기 위해 선로에 뛰어들거나 물속에 뛰어드는 부모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식의 죽음이 눈앞에 닥쳤을 때에 발휘되는 본능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당장이 아닌 미래의 후손을 위해 내 목숨을 버릴 수 있을까. 그럴 사람은 없을 것이다. 미래의 후손에게 닥칠 문제는 그들이 해결하도록 맡길 수밖에 없다. 조브리스트는 이 소설에서 미래 인간의 존속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 사람으로 그려져 있다. 종교와 신앙의 맥락이 아니고서 순교자와 같은 그런 자기 희생이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인페느로]는 조브리스트의 주장과 우리 마음속에 있는 이러한 반론이 싸우는 가운데 극적 긴장을 발생시키면서 이야기를 끌어간다. 그리고 독자는 마지막 부분에 가서야 조브리스트의 의도를 잘못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실 [인페르노]의 사건 전체에 걸쳐서 랭던과 신스키, 그리고 독자는 조브리스트를 오해하고 우리의 그릇된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구의 두려움의 근거를 추적하고 싸웠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의 주요 등장 인물들과 독자는 조브리스트가 말한 질병의 뜻을 전통적인 개념으로 이해하고 그것이 만들어낸 허깨비와 싸운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인페르노]의 스릴에 가득 찬 이야기는 실체가 없는 우리의 상상력과 싸운 이야기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우리는 조브리스트가 인구의 1/3을 무작위로 죽이려는 비윤리적 괴물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인류를 구한다는 명분으로 그가 최종적으로 실천한 행위는 과연 정당한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다수의 생명을 위해 소수의 희생을 당장 결단하여야 하는 구명보트의 상황보다는 윤리적 판단이 더 어렵고 복잡한 유전공학의 상황으로 문제가 넘어가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건 그렇고, 인류는 과연 존속해야 하는가

그런데 인류는 존속해야 하는 것일까? 많은 윤리적 토론이 인류가 존속해야 한다는 것을 당연한 전제로 두고 이루어진다. 인류 존속이 절대선인 것처럼 말이다. 인류는 멸망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인간 행위의 지향과 선택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식이다. 왜 그 전제는 의심되지 않는 것일까?

인류는 존속해야 하는 것일까? 나로선 이 문제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다. 누가 왜, 냐고 물으면 인류라고 존속해야 한다는 이유가 있느냐, 하고 되묻겠다. 개인의 삶에 종말이 있듯이 인류에도 종말이 있을 수 있는 거 아닐까. 그렇게 말하면 또 누군가, 인류가 종말에 이르러 조브리스트의 영상이 보여주는 것처럼 모두가 지옥과 같은 고통을 겪을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느냐고 나에게 물을 수가 있겠다. 그럼 나는 그거야 어쩔 수 없는 과정이지 않겠는가 하고 대답하겠다. 한 개인도 죽음을 맞이하려면 노화에 따른 갖가지 무서운 병의 고통과 죽음의 공포를 겪는다. 그리고 그것을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인류도 죽음을 맞이하려면 그런 쇠퇴와 종말의 증상을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라고 나는 대꾸하겠다. 그렇다고 내가 인류의 멸망을 원한다는 것은 아니다. 인류가 오래 존속할 수만 있다면 그것도 나쁠 것이 없다.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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